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거나 그런 상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오히려 우리 앞에 펼쳐진 끝없는 사막을 묵묵히 가리키겠네.
섣부른 위로의 말은 하지 않겠네. 오히려 옛 문명의 폐허처럼 모래 구릉의 여기저기에 앙상히 남은 짐승의 유골을 보여주겠네
- 김 진경 시인의 시 ‘낙타’ 중에서 - -------------------------------------
두 팔이 없고 한쪽 발이 짧게 태어났지만 세계적인 가스펠 가수가 된 레나 마리아의 사연 중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부분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레나가 어린 시절에 친구 집 정원에서 넘어지면 "저기 울타리까지 굴러 가보렴 ! 울타리에 기대면 일어날 수 있을 거야."라며 스스로 일어나도록 했다고 합니다. 데굴데굴 굴러가 벽을 잡고 겨우 일어서느라 상처투성이가 되었던 장애인 딸을 지켜보는 그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가까운 누군가 불행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위로와 직접적 지원이 가장 큰 배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네 잘못이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다.’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등등의 위로를 하거나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려 합니다. 하지만 과연 모든 위로와 지원이 상처받은 자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요? 과연 누군가의 삶이 성장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꼭 그 사람에게 따뜻한 도움이나 지원이 부족해서였을까요?
때 이른 위로와 직접적 지원이 때로는 고통이나 상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성장의 기회를 빼앗을 수도 있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뜻함과 냉정함 모두가 부모에게 중요한 덕목이며 이 둘 사이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절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배려에 대한 일면적 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함께 아파해주는 따뜻함도 배려이지만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스스로 헤쳐갈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봐주는 냉정함 또한 또 다른 형태의 배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따뜻함이 독이 될 수 있음을, 상처 입은 자가 스스로의 상처를 꿰맬 수 있도록 지켜보는 관심있는 냉정함 또한 배려가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성장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2009. 8. 4. '당신의 삶을 깨우는' 문요한의 Energy Plus [3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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