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치고 싶고 멀리하고 도망다녔던 외로움과 친구가 됐다.
외로움에 밥말아먹고
외로움과 차를 마시고
외로움을 둘둘말아 베개 삼고
외로움을 덮고 잤다
외로움과 친구가 됐다.
이젠 별로 두렵지 않다.
이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동행해준 고마운 나
잠이 안와서 뒤척였는데도 눈을 뜨니 6시.
닭도 울고 동네가 깨어나는 소리가 점점 들려온다.
아직은 더워서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시고 낮에 쉬었다가 오후 해질녘에 또 일을 하실 것이다.
나도 일찍 출발해서 덜 더울때 많이 걸으리라.
이장님은 먼저 나가시고 사모님은 나만 아침상을 차려주시고 이따 이장님과 드신다고 했다.
원래 아침밥은 안 먹지만 그래도 초면의 어르신이 차려주시니 맛있게 먹었다.
숙박비는 3만원. 장부에 다녀간 기념 인사도 적었다.
할머니도 다음에 또 오라고 문앞까지 배웅오시고 사모님은 일터 가는 길이라며 내가 가야 할 방향까지 동행해 주셨다.
가면서 먹으라고 직접 농사지으신 사과 두 개를 주시고 호두도 주셨다.
뒷산으로 넘어가는 길로 올라가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혼자 왔느냐며 늙은 오이를 주신다. 호박이나 수세미인줄 알았는데 오이였다.
사모님과 헤어지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숲길을 가는데 길섶이라는 지리산 사진 갤러리가 안내돼 있었다.
갑자기 사진이 보고 싶어서 그쪽으로 찾아가려고 길을 들었다.
생각보다 좀 멀었는데 황토로 지은 버섯 모양의 집이 세 채 정도 보였다.
개량 한복을 입은 여인이 맞아 주었다.
지리산에 들어와 10년동안 지리산을 찍은 사진작가의 작품을 둘러보고 차 마시는 방으로 들어갔다.
민박도 하고 차도 마시는 그런 곳이어서 사람들이 있었다.
여자 두 명이 왔는데 모두 임신 3개월, 4개월의 임산부였다. 대단하는 생각과 더불어 조심하라고 일러줬다. 생각해보니 나도 임신했을 때 보성 차밭에 그리도 가고 싶었는데 못가고 딸내미 6살때나 가게 된 것 같다.
차를 따라주는 여자분은 사진작가가 전시회땜시 서울에 가야돼서 잠깐 집을 지켜주게 된 손님이었다. 얼마전 회사에서 짤리고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시원시원한 모습, 조근조근한 말씨가 지리산 황토집과 참 잘 어울렸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드디어 다랭이논이 나왔다. 산을 깎아 층계모양으로 만든 논. 단칸방처럼 작디 작은 논.
그 손바닥만한 논을 만드느라 온 식구가 얼마나 이 산골에서 고생고생을 했을까나....
삶이란 노동이란, 생존이란 참으로 대단하고 눈물나는 일이다.
호남의 너른 평야를 보다가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 산을 헐고 돌을 골라 만든 이 퍼즐같은 논을 보니
여러 생각이 스쳤다. 인간은 참 위대하고 산은 참 고마웠다. 제 몸을 헐어 생명을 부지하고 낳고 살고 기르게 해주니 말이다.
땡볕에 둥글둥글 논을 지나 숲으로 다시 접어드니 커다란 정자나무 아래 쉼터가 있었다.
노부부 한 쌍이 평상에 앉아 먼저 땀을 식히고 있는데 나보고 쉬었다 가라고 하시며 막걸리 잔을 주셨다. 시원하게 한 잔 먹고 나도 땀을 식혔다. 채소밭쪽에 나홀로 다방이라는 화살표가 있었는데 화장실을 말하는 것이다. 야외화장실이었는데도 깔끔하고 분뇨도 겨로 덮어놔서 냄새가 거의 없었다.
노부부가 숲을 넘어가면 금계까지 쉴 곳이 없다시며 아예 밥을 먹고 가라고 하셔서 그 집에서 담근 된장으로 만든 국에 지리산 나물에 칡잎지짐이, 고추지짐이에 밥을 먹었다.
바로 앞에 있는 밭에서 따온 채소들이라 부드럽고 싱그러웠다. 난생 처음 칡잎지짐이를 먹었다.
배가 부르니 숲길이 좀 힘들었다. 오전에는 두루두루 보면서 여유있게 가자 싶었는데 정오가 지나니 마음이 좀 바빠졌다. 2코스 중간까지는 가고 싶었다. 오후 2시께가 되니 다리도 조금씩 후들후들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요즘은 운동도 안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많이 걸으니 다리가 웬일이냐 싶어하는 것 같았다. 해도 무척 강해서 땀도 많이 흘렸고 배낭도 무겁게 느꼈졌다. 산길을 거의 내려오니 1코스 마지막 지점인 나마스테 산장이 나왔다. 솔잎산야초 차를 시원하게 마시며 환하게 트인 산자락을 바라보았다. 풍광이 정말 끝내주는 곳이다. 주인장께 풍수지리 공부를 하고 자리를 잡았냐고 물어봤다.
2코스까지 가고 싶다고 하니 서둘러야 한다며 2코스 중간에 있는 사유지 길을 주인이 막아서 그 다음 지점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고 알려줬다.
다니다 보면 눈으로만 보고 농작물을 만지지 말라고 하는 안내문이 자주 눈에 띈다. 도대체 누가 얼마나 더 먹겠다고 농민들의 것에 손을 댄단 말인가 싶었다.
사유지 길을 막은 것도 그 때문은 아닐까 걱정도 됐다. 곳곳에 전기가 흐르는 철망도 있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힘을 다해 서암 굴법당과 벽송사에 올라갔다 왔다. 굴을 파서 법당을 만들고 벽에 불상조각을 한 서암정사는 장관이었다. 대단한 불심아니면 어찌 예술품이 나오랴 싶었다. 벽송사는 남과 북 이념대립 전쟁의 상처를 갖고 있었다. 6.25 전쟁때 인민군 야전 병원으로 사용돼서 국군에 의해 불에 타버려 다시 만들었던 것이다. 미인송과 도인송이라는 키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더 예뻐지라고 미인송을 한 참 쳐다봤다. 키가 자라서 자꾸 구부러져 받침대로 중간을 받쳐 놓았다. 가뿐 숨을 돌리며 일상의 번뇌를 덜어내고자 두 팔 높이 들어 천천히 큰 절을 하고 내려왔다. 힘이 급격히 없어지고 볼 것이 많아 시간이 많이 지체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2코스의 나머지는 내일 아침 일찍 도전하기로 하고 막힌 둘레길을 버스로 이동해서 걸을 수 있는 곳에 펜션을 잡았다. 책을 보고 전화를 했다.
버스에 내리니 펜션에서 할아버지가 마중을 오셨다. 정류장에서 펜션까지 약 1.5킬로 걸어가야 하기에. 그곳 근처에는 수퍼도 거의 없는 산촌이었다. 갑작스런 여행과 걷기에 몸이 긴장했는지 달거리를 시작했다. 준비를 못해서 할아버지께 수퍼마켓없냐고 했더니 없을 뿐만 아니고 그런 여성용품은 거의 안판다고 했다. 시내로 나가야 한다고.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화를하더니 며느리에게까지 물어보셔서 다행히 있다고 해서 그냥 펜션으로 갔다. 휴~~ ^^
그 펜션에 투숙객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숙박비 3만원. 나라에서 만든 펜션이긴 했지만 비성수기이고 여인네 혼자 왔고 하니 할아버지가 아들하고 상의해서 3만원을 받았다. 먹을 것도 없어서 신라면 천원 주고 사고. 그게 내 저녁이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둘러 볼거리들을 설명해 주시고 내일 아침에 가볼만한 곳을 일러 주셨다. 5-6명 묵을 만한 펜션에 덩그러니 나 혼자 있었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씻고서 편안하게 누웠다. 너무 피곤한데 잠은 안오는 상태였다. 책을 보다 텔레비젼을 보다 글을 끄적이다가 잠이 들었다. 어젯밤 민박보다 훨씬 무서웠다. 공개된 펜션이이서. 약간의 스릴도 있었지만 하루종일 걸어서 다리가 딴딴해졌다. 몸이 부웅 뜬 것 같이 얼얼했다.
헉, 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쪽 쌍거풀이 없어졌다.
울고 잔 것도 아닌데 이게 웬일이람.
잠을 못자고 뒤척이고 엎어져서 자서 그런가.

첫날, 사진기가 꽉차서 어쩔수 없었다(급하게 여행간 티를.....) 다녀온 다른분들의 사진을 쓴다.양해바래요^^
외롭고, 무섭고, 너무나 현실적인 밤시간을 보내셨네요.
답글삭제괜찮아님은 눈이 매력인데~ :)
첫번째 글을 볼 때만해도 가보고 싶다 싶었는데
두번째 글에서 그 현실이 느껴져서 살콤 기가 죽어지네요.
끝까지 다 보고 결정할래요~ :)
@회색웃음 - 2009/09/16 19:06
답글삭제고마워요^^ 정말 권투선수 눈처럼 됐었거든요 ㅎㅎ.가보는게 좋아요.얻는게 많아요.뱃심도 생기고 무서울게 없고요.마음도 좀 넓어지고.외로움과 친구되는 것도 얼마나 가벼워지는 느낌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