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혼자걷기 여행은 2박 3일인데
갔다온 여행후기는 일주일이 넘는다.
묵혀야 할 장도 아니고........
생생한 마음, 생각, 추억 남겨두고 돌아보고 싶은데
이리 부산스러워서리..
하여튼
마지막날 아침,
간밤을 얼마나 뒤치락거리며 잠을 설쳤는 지
한쪽 쌍거풀마저 시합끝난 권투선수처럼 부어서 풀린 채
펜션집 할아버님이 말씀해 주신 추모공원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길을 나설 차비를 했다.
12시 30분에는 집으로 가는 차를 타야 했고 집 근처로 가면 일주일동안 제주도에 가 있다 오는
딸내미 마중하러 김포공항으로 가야 했다.
딸내미 난생 처음 하는 긴 여행을 마중해 주고도 싶은 이 에미 마음.
방을 정리하고 사무실 같은곳에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만 할머니가 계셨다.
풀린 쌍거풀이 신경쓰였지만 깊게 눌러쓴 모자 그림자와 두 배로 칠한 아이라이너로
어찌 돼 보이리라 여기며 인사를 드렸다.
밥을 먹고 가라고 하셨지만 간 밤에 라면도 아직 뱃속에서 묵직하고
원래 아침은 안 먹기에 웬 젊은 남자 여행객까지 나와서 먹고 가라는 권유를 과감히 뿌리치고
길을 나섰다.
지리산 둘레길 11.9 ㎞ 동쪽 코스였지만 난 3분의 1 지점인 추모공원까지 가기로 했다.
가는 길 왼쪽으로 엄천교라는 맑디 맑은 지리산 계곡이 함께 해줬다.
마음같아선 당장이라도 가서 옷을 벗고 신나게 놀고 싶었지만
딸내미 마중가야 한다는 고놈의 사명감과 모정이 몸과 마음을 붙잡았다.
지리산은 그냥 길가다가 눌러 앉으면 그곳이 명경지수요 청정녹음인 것 같다.
이 맑은 물이 둥글둥글 가슴아린 조각논인 다랭이 논을 먹여 살리는구나 하고 고마웠다.
전날 잠은 설쳤지만 그래도 일찍 자리에 들어서 그런지 다리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원기마을을 숲 길에서 나와 마을을 지나는데 할머니 두 어분을 만났다.
다들 여자 혼자 다니냐며 누가 잡아가면 어쩌냐며 걱정 한마디씩을 하셨다. ㅎㅎ
그러시면서도 한 편으로 이렇게 혼자 둘레길을 찾아오는 몇 몇 여성들을 보고
그럴 수도 있구나 하시는 것 같았다.
지리산 둘레길에 사시는 여성들은 시집와서 거의 동네를 떠나본 적이 없이 그저
할배가 된 신랑하고 시어르신들하고 농사만 지으시고 자식들을 기르신 분들이 많았다.
사실 매일 보는 산, 매일 보는 논바닥, 풍광보다는 고된 노동이 먼저 떠오를 주민들이기에 동네를 지나는 둘레길 여행객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방곡마을 추모공원은 1951년 설을 쇤 다음 날 700여명이 국군에 의해 몰살당한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지역이었다. 하루 이틀사이로 그 당시 설을 맞아 화기애애했을 때에 느닷없이 나타난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작전명령을 받아 주민들을 죽인 것이다.
잔인하게도 사망자의 50% 어린아이들이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겠다며 마을 뒷산 공터나 학교 운동장으로 모두 모이게 하고
땅을 파게 한뒤 기관총을 난사해서 죽였단다.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와서 확인 사살했고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증거를 없애기도 했다는 거다.
인간이 본래 그런 것인가 전쟁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가까스로 살아난 아이들이 지금은 백발의 노인이 되어 몸에는 갖가지 총상을 안고
숨소리 한 번 못내고 기막힌 세월을 살아오다가 억울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져서
추모공원을 세운 것이란다.
지리산 곳곳에는 소위 말하는 무장공비의 아지트가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다.
치떨리던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뜨거운 사람들이
활동하다가 이념의 대립, 전쟁으로 묶여 최후를 맞이 한 곳.
나는 둘레길을 돌아본 것이지만 지리산은 능선은 몸을 숨기고 조용하게 움직이기에 알맞게
깊고 깊은 것 같았다.
대학때 비장하게 부르던 '지리산' 이라는 노래가 더 실감나게 기억났다.
추모공원 약간은 한적한 그 공원의 관리소장인 듯한 분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고
책도 한 권 주셨다. 학살 당시 살아난 어느 분이 쓰신 책이었다. 기막힌 인생내력 탓인지
역술인으로 있으면서 묻혀진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는 추모공원 건립에 애쓴 분 같았다. 한 번 인생상담(?) 하러 가볼까 싶었다.^^
공원에서 내려와 이제 버스를 탔다.
2박 3일 걸어온 길을 버스로 바라보며 되짚어 갔다.
터미널에 가니 시간안에 김포공항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빠른 교통편을 찾아 전주로 갔다.
전주에서 부천행 고속을 타고 부천에서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달렸다.
겨우겨우 도착해서 공항문 밖으로 나오는 딸을 힘껏 안아 줄 수 있었다.
아이들도 긴 여행에 약간은 지쳐있었지만 선생님들은 얼굴과 몸이 수척해지기까지 했다.
십여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낯선 곳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나...
혼자 다녀왔냐는 다른 엄마들의 질문에 답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또 한 사람 혼자 있던 서방이 반겨주었다.
미안한 마음 반, 여행으로 충만한 마음 반으로 인사를 하고 두 여자는 집을 풀었다.
일요일 날 딸은 내게 상을 주었다.
' 너무 용감해서 주는 상 '
부상으로 딸이 아끼는 (내가 눈독들이고 있던) 2B 샤프연필도 줬다.
지리산둘레길
천천히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싶었다.
말없이 걸으며 내 안에서 올라오는, 내 안에서 출렁이는, 내안에서 비추는
생각, 느낌, 이미지들을 그대로 들여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낯섬이 발걸음을 재촉했고 어디까지 가야지 하는 목표설정이 또한
마음을 서두르게 했다.
몇번이고 나도 모르게 가야할 곳으로 막 가고 있는 나를 보고 속도를 늦췄다.
나도 모르게 마구 가는 것, 목표가 정해지면 100m 달리기 버전으로 달려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살아서,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성실하지 않거나 애쓰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스스로도 비난하는데 참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
다시는 오지 않고
가장 확실하게 내가 만지고 느끼고 가질 수 있는 시간.
지금 이순간 지금 여기서 만나는 인연들에 마음과 몸과 정성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깊게 든다.
내 안의 유목민 기질. 노마드.
소유하지 않고 공유하면서 바람처럼 인연을 따라 왔다가
또 새로운 인연을 따라 풀씨처럼 날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생각.
조금 가난하거나 부족하더라도
몸과 마음과 영혼이 채워지고 비워지는 느낌이 살아있는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
젊은 청춘에 막연한 애국심으로 통째로 사랑했던 이 땅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보니
구체적인 정이 들고 새롭고 새롭다.
기회가 닿으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 남은 걷기여행을 하고
이 땅을 딸과 함께 돌아보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도전해 보고 싶다.
이젠 뭘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버스 운전을 하든 샐러리맨을 하든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든
물론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이지만
그 밑에 겨울 강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처럼 살아있는
꿈이나 희망이 있어야
사는 맛이 있을 것 같다.
자식키우는 맛도 한 맛이기는 하지만
내가 행복한 어떤 맛, 내가 살아있는 어떤 맛을
잊지 말고 살려가며 살아야 진짜 사는 맛이 나고
눈빛도 얼굴색도 생글생글 윤기가 날 것 같다.
외로움과 친구가 된 길.
아직도 무조건적인 사랑이 뿜어져 나오는 사랑의 샤워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나이긴 하지만
뚜벅뚜벅 나를 만나고 세상을 느끼는 길을 혼자서 갈 수 있는
자신을 얻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