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30일 수요일

멘토(또는 멘터)는 - '인생길잡이' 로

‘멘토(또는 멘터)’는 ‘인생길잡이’로

  국립국어원은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말터, www.malteo.net)’ 누리집을 통해 ‘새로운 인생 설계를 위해 도움을 주는 조언자, 또는 후견인’을 가리켜 이르는 ‘멘토(또는 멘터)’의 다듬은 우리말로 ‘인생길잡이’를 최종 선정하였습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공부’란 평생의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수험생들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엄청난 공부량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또 많이 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세운 목표치에 도달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더 나은 공부 방법을 원하는 학생들이 멘토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들만이 누리는 특권은 아닙니다. 직장 생활에서 개인의 지식 및 지혜가 발달할 수 있도록 언제든지 찾으면 옆에서 사심 없이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멘토입니다. 힘든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인 것이지요. 멘토는 그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일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멘토 또는 멘터(Mentor)란 말은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이타이카 왕국의 왕인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떠나며, 자신의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보살펴 달라고 한 친구에게 맡겼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바로 멘토였다고 합니다. 그는 오딧세이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텔레마코스의 친구, 선생님,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그를 잘 돌보아 주었고, 그 후로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개인이나 조직 생활에서 조언자, 또는 후견인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 대학에서는 배움의 기회가 적은 저소득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학습·인성·문화 멘터링을 실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방과 후 부족한 부분의 학습을 도와주기도 하고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또한, 몇몇 사람들은 미래의 인생 설계를 위해 멘토를 정하기도 하고, 그렇게 멘토로 인해 조언을 받았던 사람들이 또 다른 조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멘토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말터 누리집에서는 ‘멘토(또는 멘터)’를 대신할 우리말을 정하고자, 누리꾼이 제안한 362건 가운데 ‘조언자’, ‘앞길조언자’, ‘인생길잡이’, ‘인생도우미’, ‘삶도우미’ 모두 다섯을 후보로 하여 투표를 벌였습니다. 그 결과 모두 1,488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50%의 지지를 얻은 ‘인생길잡이’를 ‘멘토(또는 멘터)’의 다듬은 말로 결정하였습니다. ‘인생길잡이’가 ‘멘토(또는 멘터)’를 대신하는 우리말로 완전히 정착될 수 있도록 널리 써 주시기 바랍니다.

- 자료 정리: 김형배(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2009년 9월 28일 월요일

재미지게 사건만드는 기술?

로널드 B. 토비야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풀롯>(풀빛 1997)

1. 긴장이 없으면 풀롯이 없다
2. 대립하는 세력으로 긴장을 창조하라.
3. 대립하는 세력을 키워 긴장을 고조시켜라
4. 등장인물의 성격은 변해야 한다
5. 모든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 되게 하라
6. 결정적인 것을 사소하게 보이도록 하라
7. 복권에 당첨될 기회는 남겨둬라
8. 클라이맥스에서는 주인공이 중심적 역할을 하게 하라


풀롯을 발전시키고자 할 때는 다음의 질문을 고려하라

1. 이야기의 기본 아이디어가 무엇인가?
2. 이야기의 중심적 목표는 무엇인가?
3. 주인공의 의도는 무엇인가? 주인공은 무엇을 원하나?
4. 주인공의 동기는 무엇인가? 주인공은 왜? 무엇을 원하나?
5. 주인공은 누구 또는 어떤 편인가?
6. 주인공은 자신의 의도를 완성하기 위해 어떤 행동 게획을 가지고 있나?
7. 이야기의 중심 갈등은 무엇인가? 내적인가? 외적인가?
8.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이 겪는 변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9. 풀롯은 인물 중심인가? 행동 중심인가?
10. 이야기의 시발점은 무엇인가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11. 이야기 전체의 긴장은 어덯게 유지할 것인가?
12. 주인공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어떻게 완성하는가?

2009년 9월 26일 토요일

주문걸기

 

1. 나는 신의 창조성의 통로이고, 내 작품은 결국 훌륭해질 것이다.

2. 내 꿈은 신에서 나왔고, 신은 그것을 이루게 할 힘을 갖고 있다.

3. 창조적인 작업을 하며 거기에 귀 기울일 때 나는 창조성으로 인도 될 것이다.

4. 창조성은 나에 대한 창조자의 의지이다.

5. 나의 창조성은 나와 다른 사람을 치유한다.

6. 나는 나 자신의 창조성을 키워야 한다.

7. 몇 가지 간단한 도구들을 사용하다 보면 나의 창조성은 발전할 것이다.

8. 나의 창조성을 이용해서 나는 신을 섬긴다.

9. 나의 창조성은 항상 진실과 사랑으로 날 인도한다.

10. 나의 창조성은 나를 너그럽게 만들고 나 자신도 용서하게 만든다.

11. 나를 위한 신성한 계획이 있다.

12. 내 작업을 위한 신성한 계획이 있다.

13. 내 안에 있는 창조주의 말을 따르면 나는 창조성으로 인도된다.

14. 내 안의 창조성에 귀 기울이면 나는 창조주에게 인도된다.

15. 나는 기꺼이 창조할 것이다.

16. 나는 기꺼이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배울 것이다.

17. 나는 기꺼이 신이 나를 통해 창조하도록 할 것이다.

18. 나는 기꺼이 나의 창조성을 통해 봉사할 것이다.

19. 나는 기꺼이 나의 창조적인 힘을 경험할 것이다 .

20. 나는 기꺼이 나의 창조적인 재능을 사용할 것이다.

 

                                                   <내 안의 창조성을 깨우는 12주간의 여행 아티스트웨이> 중에서

 

주문을 걸어봐~~~ 내 안의 움직임과 얘기를 들어봐~~

2009년 9월 23일 수요일

누가 나를 깨웠소?

4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쫓기는 꿈을 꿨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배편에서 아는 사람 동생의 협박전화를 받는 장면으로 끝난다. 배가 닿는 곳에 그의 부하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영화같다. 좀...

 

어젯밤 딸을 재우는데 멧돼지들이 꿈에 나타나 자신과 친구들을 습격하는 꿈을 꿨다고 했다.

그제 저녁 뉴스에서 요즘 도시 곳곳에서 출몰하는 멧돼지에 대한 영상을 보고 꾼 꿈인것 같다. ㅎㅎ

 

누가 나를 이 새벽에 깨웠는가?

왜?

 

월요일 듣는 한권의 책쓰기 동화강좌에서 내준 숙제때문일까?

돌덩이에서 원료를 뜯어내놓긴 했는데 세공작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마음일까나?

정말 올해 가기전에 한 편 써보려고 어린이동화강좌 '한권의 책쓰기'를 신청해서

낯설고 먼 상암동, 소설책에서나 봤던 수색이라는 지명도 보이는 곳까지 다니건만

(사실은 무료라서 그럴거야.ㅎㅎ)

 

거친 돌더미에 채취한 아직도 많이 거친 재료들.

이제 막 숲속에서 따온 아직은 잎사귀이며 식물에 불과한 아로마 풀.

 

이것들로 어떻게 소박하더라도 성실함과 진정성이 녹아있는 보석 한 알, 향수 한방울을 만들까나.

 

숙제때문이지만 작심하고 읽기 시작한 어린이 문학의 감동과 웃음, 삶에 녹아 있는 희망이

가슴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갔던 일요일 오후와 월요일 아침.

내가 맛보지 못하고 진열하고 권하기만 했던 시간들이 또 약간의 후회로 다가왔지만 이건 바로 걷어냈다.

책과 좀 더 깊이 만나고 친해지면서 정말 친구가 생긴 것 같고 스승이 생긴 것 같다.

친화력있다고 내심 자부하면서 살았지만 막상 들춰보면 얼마나 직접적인 사람관계에서 서툴고 어색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지.(겉으로는 안그런척 하면서...)

상대의 한마디 말, 한순간의 눈빛, 한동작의 몸짓에서 많은 경우의 수와 생각들을 추론해 내는 복잡하고 미세한 내 생각, 느낌, 감정.

 

그래서 만남보다는 책을 보게 되고, 말보다는 문자나 편지를 보내고 싶은 것일까?

실수하고 미숙할 수 있는 권리.

이제 어른인 내게는 잘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지만 아직도 내 안에는 어설픈 어른, 아이와 같은 어른이

떼를 지어 다니고 있다^^

 

아, 이 말을 쓰려고 일어난 것일까?

이게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아티스트웨이>에 나오는 모닝페이퍼 작업일까나?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3쪽의 글을 써라, 생각나는 게 없고 쓸 것이 없으면 그렇다고 시작하고 써라.'

 

요즘 자꾸 느껴지고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얼마전 얘기한 것 같기도 하다.

쇼생크 탈출때 주인공에게 쏟아지는 그 시원한 빗줄기 같은 샤워기.

물에 풀리는 화장지같이 몸을 푹 담그면 녹아질 것 같이 편안하고 충만한 욕조.

 

외롭고 서늘하고 무겁고 쓸쓸하고 허전하고 무가치하다고 느껴질때마다

 

분수처럼 햇살처럼 비단처럼 솜털처럼 폭포처럼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두드리며

충분히 충분히 적셔 줄 물줄기를, 사랑의 물줄기를 뿜어내는 샤워기. 언제나 틀 수 있는 샤워기가.

 

 

 

 

 

목만 내놓고 눈을 감은 채 따스하게 얼굴로 올라오는 수증기를 느끼면서

순간 물속에 수욱하고 들어가 눈을 뜬 채 바라보다가 어푸하고 소리를 내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목을 한껏 져쳐 입을 벌리고 뱃속 깊은 숨을 내마시며

땀구멍 하나하나에 물기가 충분히 충분히 배여 온몸이 적셔지고 물기로 차오르는 그런 충만함을 주는

이왕이면 장미꽃잎도 아로마 차잎도 떠 있는 그런 뜨끈 따스한 욕조가. 언제나 잠길 수 있는 욕조가.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찜질방이라도 가야하나. 이 두가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 것다.^^

 

 

내 속의 무엇이 이렇게 말을 걸고 이미지를 출력해 내는 것일까?

 

내 속의 누가 잠을 깨우고 나를 일으키는 걸까?

 

따스한 노오란 빛을 좋아하는 내면아이가

아무 조건없는, 무조건의 충만한  사랑을 흠뻑 받고 싶다고 내가 아우성인 것 같다.

이리도 절절하게 아이는 사랑이 필요했던 것일까?

애쓰지 않고 그냥 거저 주어지는

마냥 받기만 해도 되는

그런 사랑을 이토록 이토록  바라고 있었나

 

 

들어줘야 할 것 같다.

세공작업과 조제작업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칠흙의 하늘이 남빛으로 환해졌다. 곧 피곤이 몰려오겠지. 울 딸 학교 보내야 하는디.

 

첫 술에 배부를 수 없고

첫 등판에 홈런 칠 수 없고

 

그저 아직도 고구마 삶다가 안 태운 적이 없는 것처럼

그저 아직도 단호박 삶다가 호박죽 만들어 온 것처럼

실패해도 모자라도 그게 인생이고 실패하는 방법을 한 가지씩 알아가서

누구처럼 99가지 실패에 1가지 하늘의 보너스를 믹스해서

원하는 것을 해보는, 그것이 꼭 성공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것을 만드는 기쁨과 후련함을

느끼면 되는 거지.

 

일단 양수기로 내 안에 고인 물을 퍼내고

채굴기로 원석을 떼어 모으는 작업을 해보고.

 

인류의 정신 문화 유산인 좋은 책들을 보면서 세공도구와 절대음감같은 감각을 민감하게 훈련해서

이렇게 고요한 나만의 시간에

이렇게 누군가 깨워주는 소중한 시간에

해보자.

 

이게 오늘 네가 내가 하고픈 말이었니?

 

 

 

2009년 9월 21일 월요일

지리산둘레길 혼자걷기 마무리 -헥헥

지리산 둘레길 혼자걷기 여행은 2박 3일인데

갔다온 여행후기는 일주일이 넘는다.

묵혀야 할 장도 아니고........

생생한 마음, 생각, 추억 남겨두고 돌아보고 싶은데

이리 부산스러워서리..

 

하여튼

마지막날 아침,

간밤을 얼마나 뒤치락거리며 잠을 설쳤는 지

한쪽 쌍거풀마저 시합끝난 권투선수처럼 부어서 풀린 채

펜션집 할아버님이 말씀해 주신 추모공원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길을 나설 차비를 했다.

12시 30분에는 집으로 가는 차를 타야 했고 집 근처로 가면 일주일동안 제주도에 가 있다 오는

딸내미 마중하러 김포공항으로 가야 했다.

딸내미 난생 처음 하는 긴 여행을 마중해 주고도 싶은 이 에미 마음.

 

방을 정리하고 사무실 같은곳에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만 할머니가 계셨다.

풀린 쌍거풀이 신경쓰였지만 깊게 눌러쓴 모자 그림자와 두 배로 칠한 아이라이너로

어찌 돼 보이리라 여기며 인사를 드렸다.

밥을 먹고 가라고 하셨지만 간 밤에 라면도 아직 뱃속에서 묵직하고

원래 아침은 안 먹기에 웬 젊은 남자 여행객까지 나와서 먹고 가라는 권유를 과감히 뿌리치고

길을 나섰다.

 

지리산 둘레길 11.9 ㎞ 동쪽 코스였지만 난 3분의 1 지점인 추모공원까지 가기로 했다.

가는 길 왼쪽으로 엄천교라는 맑디 맑은 지리산 계곡이 함께 해줬다.

마음같아선 당장이라도 가서 옷을 벗고 신나게 놀고 싶었지만

딸내미 마중가야 한다는 고놈의 사명감과 모정이 몸과 마음을 붙잡았다.

지리산은 그냥 길가다가 눌러 앉으면 그곳이 명경지수요 청정녹음인 것 같다.

이 맑은 물이 둥글둥글 가슴아린 조각논인 다랭이 논을 먹여 살리는구나 하고 고마웠다.

전날  잠은 설쳤지만 그래도 일찍 자리에 들어서 그런지 다리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원기마을을 숲 길에서 나와 마을을 지나는데 할머니 두 어분을 만났다.

다들 여자 혼자 다니냐며 누가 잡아가면 어쩌냐며 걱정 한마디씩을 하셨다. ㅎㅎ

그러시면서도 한 편으로 이렇게 혼자 둘레길을 찾아오는 몇 몇 여성들을 보고

그럴 수도 있구나 하시는 것 같았다.

지리산 둘레길에 사시는 여성들은 시집와서 거의 동네를 떠나본 적이 없이 그저

할배가 된 신랑하고 시어르신들하고 농사만 지으시고  자식들을 기르신 분들이 많았다.

사실 매일 보는 산, 매일 보는 논바닥, 풍광보다는 고된 노동이 먼저 떠오를 주민들이기에 동네를 지나는 둘레길 여행객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방곡마을 추모공원은 1951년 설을 쇤 다음 날 700여명이 국군에 의해 몰살당한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지역이었다. 하루 이틀사이로 그 당시 설을 맞아 화기애애했을 때에 느닷없이 나타난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작전명령을 받아 주민들을 죽인 것이다.

잔인하게도 사망자의 50% 어린아이들이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겠다며 마을 뒷산 공터나 학교 운동장으로 모두 모이게 하고

땅을 파게 한뒤 기관총을 난사해서 죽였단다.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와서 확인 사살했고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증거를 없애기도 했다는 거다.

인간이 본래 그런 것인가 전쟁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가까스로 살아난 아이들이 지금은 백발의 노인이 되어 몸에는 갖가지 총상을 안고

숨소리 한 번 못내고 기막힌 세월을 살아오다가 억울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져서

추모공원을 세운 것이란다.

 

지리산 곳곳에는 소위 말하는 무장공비의 아지트가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다.

치떨리던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뜨거운 사람들이

활동하다가 이념의 대립, 전쟁으로 묶여 최후를 맞이 한 곳.

나는 둘레길을 돌아본 것이지만 지리산은 능선은 몸을 숨기고 조용하게 움직이기에 알맞게

깊고 깊은 것 같았다.

대학때 비장하게 부르던 '지리산' 이라는 노래가 더 실감나게 기억났다.

추모공원 약간은 한적한 그 공원의 관리소장인 듯한 분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고

책도 한 권 주셨다. 학살 당시 살아난 어느 분이 쓰신 책이었다. 기막힌 인생내력 탓인지

역술인으로 있으면서  묻혀진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는 추모공원 건립에 애쓴 분 같았다. 한 번 인생상담(?) 하러 가볼까 싶었다.^^

 

공원에서 내려와 이제 버스를 탔다.

2박 3일 걸어온 길을 버스로 바라보며 되짚어 갔다.

터미널에 가니 시간안에 김포공항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빠른 교통편을 찾아 전주로 갔다.

전주에서 부천행 고속을 타고 부천에서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달렸다.

 

겨우겨우 도착해서 공항문 밖으로 나오는 딸을 힘껏  안아 줄 수 있었다.

아이들도 긴 여행에 약간은 지쳐있었지만 선생님들은 얼굴과 몸이 수척해지기까지 했다.

십여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낯선 곳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나...

 

혼자 다녀왔냐는 다른 엄마들의 질문에 답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또 한 사람 혼자 있던 서방이 반겨주었다.

미안한 마음 반, 여행으로 충만한 마음 반으로 인사를 하고 두 여자는 집을 풀었다.

 

일요일 날 딸은 내게 상을 주었다.

' 너무 용감해서 주는 상 '

부상으로 딸이 아끼는 (내가 눈독들이고 있던) 2B 샤프연필도 줬다.

 

지리산둘레길

천천히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싶었다.

말없이 걸으며 내 안에서 올라오는, 내 안에서 출렁이는, 내안에서 비추는

생각, 느낌,  이미지들을 그대로 들여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낯섬이 발걸음을 재촉했고 어디까지 가야지 하는 목표설정이 또한

마음을 서두르게 했다.

몇번이고 나도 모르게 가야할 곳으로 막 가고 있는 나를 보고 속도를 늦췄다.

나도 모르게 마구 가는 것, 목표가 정해지면 100m  달리기 버전으로 달려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살아서,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성실하지 않거나 애쓰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스스로도 비난하는데 참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

다시는 오지 않고

가장 확실하게 내가 만지고 느끼고 가질 수 있는 시간.

지금 이순간 지금 여기서 만나는 인연들에 마음과 몸과 정성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깊게 든다.

 

내 안의 유목민 기질. 노마드.

소유하지 않고 공유하면서 바람처럼 인연을 따라 왔다가

또 새로운 인연을 따라 풀씨처럼 날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생각.

 

조금 가난하거나 부족하더라도

몸과 마음과 영혼이 채워지고 비워지는 느낌이 살아있는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

 

젊은 청춘에 막연한 애국심으로 통째로 사랑했던 이 땅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보니

구체적인 정이 들고 새롭고 새롭다.

 

기회가 닿으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 남은 걷기여행을 하고

이 땅을 딸과 함께 돌아보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도전해 보고 싶다.

 

이젠 뭘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버스 운전을 하든 샐러리맨을 하든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든

물론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이지만

그 밑에 겨울 강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처럼 살아있는

꿈이나 희망이 있어야

사는 맛이 있을 것 같다.

자식키우는 맛도 한 맛이기는 하지만

내가 행복한 어떤 맛, 내가 살아있는 어떤 맛을

잊지 말고 살려가며 살아야 진짜 사는 맛이 나고

눈빛도 얼굴색도 생글생글 윤기가 날 것 같다.

 

외로움과 친구가 된 길.

아직도 무조건적인 사랑이 뿜어져 나오는 사랑의 샤워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나이긴 하지만

뚜벅뚜벅 나를 만나고 세상을 느끼는 길을 혼자서 갈 수 있는

자신을 얻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009년 9월 17일 목요일

내 집중시간은?

아침 5시 20분,

우선 정신이 깨고 판단을 한다. 잠이 다시 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오면 일어난다.

뒤척이며 자는 딸내미를 위해 옆에서 책을 읽을까싶기도 하지만 불을 켜야하니

아이의 숙면에 안좋을 것 같아 방을 나와 책방으로(여긴 내방이야, 내방!!) 옮겨와서 컴을 켠다.

 

영혼이나 의식이나 제일 맑을 시간.

책을 읽기도 하고 뭔가 쓰고 싶은 시간.

 

저녁에 아이랑 함께 있을 때 컴퓨터를 쓰는게 여간 쉽지가 않다. 차라리 책을 읽으면 이해해주는데

딸은 컴퓨터를 제 수준에서(영상음향으로 노는 기계- 선덕여왕 다운 받아서 보는 것, 소녀시대 동영상 보는 것) 이해하고 있기에 내가 컴퓨터를 하는게 자기가 텔레비젼을 보는 것과 동격으로 생각한다.

'엄마가 일기도 쓰고 사전도 찾고, 그림도 그리는 거야' 하고 설명해도

자기는 일기를 손으로 쓰는데 왜 엄마는 컴퓨터로 하냐며 손으로 쓰라고 한다. 헉!

그래서 내가 컴퓨터를 쓰는 시간을 아이가 자는 시간으로 조정해야 할 것 같다.

일찍 재우고 새벽에?

 

원래 좀 일찍 자거나 뭔가 고민거리가 있으면 새벽 2시나 3시에 일어나곤 했다.

그러고 나면 아침 6시나 7시께에 피곤이 몰려온다.

이 버릇은 초등학교 6학년때 몸에 밴 것 같다. 그때에 밤 10시 정도에 자서 새벽 2시께 일어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5시경에 다시 잠을 잤다.(이 때만 그랬다. 중학교 가서는...잠귀신이 붙어서..도저히..-.-)

 

이 시간이 내겐 집중이나 몰입이 가장 잘 되는 시간일까나?

 

밤 10시부터 2시까지도 집중은 잘 될 시간인데 내가 안자면 딸도 안잔다.

딸을 일찍 재우려면 내가 먼저 누워서 팔베게를 해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쮸쮸도 주고 그래야 한다. 아빠랑은 내가 어디 가거나 늦을 때만 어쩔 수 없이 잔다. 아침에 눈 뜰때 내가 없으면 "엄마~~"하고 부른다. 그 때 내가 식사준비나 컴퓨터 쓰느라 못들으면 엄청 서운해하고 화도 낸다.

힘들다. 몇 번씩 들여다 봐야 한다. 이불도 걷어차고 자니까.

 

하루에 3시간씩

온전히 어떤 것에 몰입해서

글을 쓰든 책을 읽든 공부를 하든

꾸준히 해가는 거.

 

구슬이 서말이라도 하나씩 꿰어야 하는 작업,

비단천, 모시천, 아무리 많아도 한땀 한땀 바느질을 해야 멋스런 조각보가 된다는 것.

빨주노초파남보 오색 칠색 실꾸러미가 한 광주리라도 한코 한코 뜨개질을 해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할 포근한 털목도리 된다는 거.

 

하루가 변하지 않으면

일주일이 변하지 않고

한 달이 달라지지 않고

석달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거.

 

글쓰기 선생님 말씀처럼

석달씩만 계획하고 실행하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석달이라...

체질개선 같은 몸세포의 재생주기도 한 석달정도 된다는데

뭔가 새로워 지려면 석달간의 지긋한 훈련이 필요한 듯.

 

컴퓨터를 켜고 앉으면

확인해야 할 이메일과

보고픈 여러 소식들,

급하게 처리해야 할 것들,

놓치고 싶지 않은 자잘한 이벤트들의 유혹이 만만치 않다.

 

가슴이나 머리에 차올라 출렁이는  생각과 느낌이 채 부어지기전에

뉴런의 세포돌기가 뻗어나가듯

다른 안테나가 활동을 시작하곤 한다.

 

산소통을 메고

심연의 바다속을 잠영하는

그런 밀도 높은 절대시간을 확보해 가고

그런 작업을 몸에 배게 해 가는 일.

 

몸세포들이 새로운 생체리듬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다시 일을 하게 되면

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원하는 것을 향해 가려면

농부의 마음과 농부의 발걸음, 농부의 손길같은

성실함이 기본이다.

방향없는,통찰없는 성실함의 걷잡을 수 없는 맹독성도 문제지만

꿈을 찾고 꿈을 일궈가는 고통스러울 수조차 있는 과정의 냉엄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즐길 수 있는 수준까지.

 

가을이다.

선선하고 팔뚝이 시리기도 하다.

봄부터 여름까지 이래저래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한 것들을

한가닥 두가닥 실타래로 잘 정리해야 할

이를테면 결실의 계절.

 

딸내미 잘 돌보고 편안하게 잘 놀고 마음가는 대로 해보고 살아보는 게 목표였던 올 한해.

 

어째, 이 기조에 안맞는 생각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아니, 맞는 거야. 몰입의 시간. 집중의 시간. 내가 원했던 것이야.

 

해야 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차이.

그 질적 변환을 어떻게 만들어 내야 하는 걸까?

 

우선 양적 축적을 해보고.

 

해가 뜨고 아침상 차릴  시간이 되니 집중력이 급격 떨어지는 느낌.

산소통에 산소가 다 떨어졌나?

.

.

.

혹, 다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 ^^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지리산둘레길 혼자걷기 ②

드디어 내치고 싶고 멀리하고 도망다녔던 외로움과 친구가 됐다.

 

외로움에 밥말아먹고

외로움과 차를 마시고

외로움을 둘둘말아 베개 삼고

외로움을 덮고 잤다

외로움과 친구가 됐다.

이젠 별로 두렵지 않다.

 

이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동행해준 고마운 나

 

잠이 안와서 뒤척였는데도 눈을 뜨니 6시.

닭도 울고 동네가 깨어나는 소리가 점점 들려온다.

아직은 더워서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시고 낮에 쉬었다가 오후 해질녘에 또 일을 하실 것이다.

나도 일찍 출발해서 덜 더울때 많이 걸으리라.

이장님은 먼저 나가시고 사모님은 나만 아침상을 차려주시고 이따 이장님과 드신다고 했다.

원래 아침밥은 안 먹지만 그래도 초면의 어르신이 차려주시니 맛있게 먹었다.

숙박비는 3만원. 장부에 다녀간 기념 인사도 적었다.

할머니도 다음에 또 오라고 문앞까지 배웅오시고 사모님은 일터 가는 길이라며 내가 가야 할 방향까지 동행해 주셨다.

가면서 먹으라고 직접 농사지으신 사과 두 개를 주시고 호두도 주셨다.

뒷산으로 넘어가는 길로 올라가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혼자 왔느냐며 늙은 오이를 주신다. 호박이나 수세미인줄 알았는데 오이였다.

 

사모님과 헤어지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숲길을 가는데 길섶이라는 지리산 사진 갤러리가 안내돼 있었다.

갑자기 사진이 보고 싶어서 그쪽으로 찾아가려고 길을 들었다.

생각보다 좀 멀었는데 황토로 지은 버섯 모양의 집이 세 채 정도 보였다.

개량 한복을 입은 여인이 맞아 주었다.

지리산에 들어와 10년동안 지리산을 찍은 사진작가의 작품을 둘러보고 차 마시는 방으로 들어갔다.

민박도 하고 차도 마시는 그런 곳이어서 사람들이 있었다.

여자 두 명이 왔는데 모두 임신 3개월, 4개월의 임산부였다. 대단하는 생각과 더불어 조심하라고 일러줬다. 생각해보니 나도 임신했을 때 보성 차밭에 그리도 가고 싶었는데 못가고 딸내미 6살때나 가게 된 것 같다.

차를 따라주는 여자분은 사진작가가 전시회땜시 서울에 가야돼서 잠깐 집을 지켜주게 된 손님이었다. 얼마전 회사에서 짤리고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시원시원한 모습, 조근조근한 말씨가 지리산 황토집과 참 잘 어울렸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드디어 다랭이논이 나왔다. 산을 깎아 층계모양으로 만든 논. 단칸방처럼 작디 작은 논.

그 손바닥만한 논을 만드느라 온 식구가 얼마나 이 산골에서 고생고생을 했을까나....

삶이란 노동이란, 생존이란 참으로 대단하고 눈물나는 일이다.

호남의 너른 평야를 보다가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 산을 헐고 돌을 골라 만든 이 퍼즐같은 논을 보니

여러 생각이 스쳤다. 인간은 참 위대하고 산은 참 고마웠다. 제 몸을 헐어 생명을 부지하고 낳고 살고 기르게 해주니 말이다.

 

땡볕에 둥글둥글 논을 지나 숲으로 다시 접어드니 커다란 정자나무 아래 쉼터가 있었다.

노부부 한 쌍이 평상에 앉아 먼저 땀을 식히고 있는데 나보고 쉬었다 가라고 하시며 막걸리 잔을 주셨다. 시원하게 한 잔 먹고 나도 땀을 식혔다. 채소밭쪽에 나홀로 다방이라는 화살표가 있었는데 화장실을 말하는 것이다. 야외화장실이었는데도 깔끔하고 분뇨도 겨로 덮어놔서 냄새가 거의 없었다.

노부부가 숲을 넘어가면 금계까지 쉴 곳이 없다시며 아예 밥을 먹고 가라고 하셔서 그 집에서 담근 된장으로 만든 국에 지리산 나물에 칡잎지짐이, 고추지짐이에 밥을 먹었다.

바로 앞에 있는 밭에서 따온 채소들이라 부드럽고 싱그러웠다. 난생 처음 칡잎지짐이를 먹었다.

 

배가 부르니 숲길이 좀 힘들었다. 오전에는 두루두루 보면서 여유있게 가자 싶었는데 정오가 지나니 마음이 좀 바빠졌다. 2코스 중간까지는 가고 싶었다. 오후 2시께가 되니 다리도 조금씩 후들후들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요즘은 운동도 안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많이 걸으니 다리가 웬일이냐 싶어하는 것 같았다. 해도 무척 강해서 땀도 많이 흘렸고 배낭도 무겁게 느꼈졌다. 산길을 거의 내려오니 1코스 마지막 지점인 나마스테 산장이 나왔다. 솔잎산야초 차를 시원하게 마시며 환하게 트인 산자락을 바라보았다. 풍광이 정말 끝내주는 곳이다. 주인장께 풍수지리 공부를 하고 자리를 잡았냐고 물어봤다.  

2코스까지 가고 싶다고 하니 서둘러야 한다며 2코스 중간에 있는 사유지 길을 주인이 막아서 그 다음 지점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고 알려줬다.

 

다니다 보면 눈으로만 보고 농작물을 만지지 말라고 하는 안내문이 자주 눈에 띈다. 도대체 누가 얼마나 더 먹겠다고 농민들의 것에 손을 댄단 말인가 싶었다.

사유지 길을 막은 것도 그 때문은 아닐까 걱정도 됐다. 곳곳에 전기가 흐르는 철망도 있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는 힘을 다해 서암 굴법당과 벽송사에 올라갔다 왔다. 굴을 파서 법당을 만들고 벽에 불상조각을 한 서암정사는 장관이었다. 대단한 불심아니면 어찌 예술품이 나오랴 싶었다. 벽송사는 남과 북 이념대립 전쟁의 상처를 갖고 있었다. 6.25 전쟁때 인민군 야전 병원으로 사용돼서 국군에 의해 불에 타버려 다시 만들었던 것이다. 미인송과 도인송이라는 키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더 예뻐지라고 미인송을  한 참 쳐다봤다. 키가 자라서 자꾸 구부러져 받침대로 중간을 받쳐 놓았다. 가뿐 숨을 돌리며 일상의 번뇌를 덜어내고자 두 팔 높이 들어 천천히 큰 절을 하고 내려왔다. 힘이 급격히 없어지고 볼 것이 많아 시간이 많이 지체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2코스의 나머지는 내일 아침 일찍 도전하기로 하고 막힌 둘레길을 버스로 이동해서 걸을 수 있는 곳에 펜션을 잡았다. 책을 보고 전화를 했다.

 

버스에 내리니 펜션에서 할아버지가 마중을 오셨다. 정류장에서 펜션까지 약 1.5킬로 걸어가야 하기에. 그곳 근처에는 수퍼도 거의 없는 산촌이었다. 갑작스런 여행과 걷기에 몸이 긴장했는지 달거리를 시작했다. 준비를 못해서 할아버지께 수퍼마켓없냐고 했더니 없을 뿐만 아니고 그런 여성용품은 거의 안판다고 했다. 시내로 나가야 한다고.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화를하더니 며느리에게까지 물어보셔서 다행히 있다고 해서 그냥 펜션으로 갔다. 휴~~ ^^

 

그 펜션에 투숙객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숙박비 3만원. 나라에서 만든 펜션이긴 했지만 비성수기이고 여인네 혼자 왔고 하니 할아버지가 아들하고 상의해서 3만원을 받았다. 먹을 것도 없어서 신라면 천원 주고 사고. 그게 내 저녁이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둘러 볼거리들을 설명해 주시고 내일 아침에 가볼만한 곳을 일러 주셨다. 5-6명 묵을 만한 펜션에 덩그러니 나 혼자 있었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씻고서 편안하게 누웠다. 너무 피곤한데 잠은 안오는 상태였다. 책을 보다 텔레비젼을 보다 글을 끄적이다가 잠이 들었다. 어젯밤 민박보다 훨씬 무서웠다. 공개된 펜션이이서. 약간의 스릴도 있었지만 하루종일 걸어서 다리가 딴딴해졌다. 몸이 부웅 뜬 것 같이 얼얼했다.

 

헉, 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쪽 쌍거풀이 없어졌다.

울고 잔 것도 아닌데 이게 웬일이람.

잠을 못자고 뒤척이고 엎어져서 자서 그런가.

 

첫날, 사진기가 꽉차서 어쩔수 없었다(급하게 여행간 티를.....) 다녀온 다른분들의 사진을 쓴다.양해바래요^^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지리산 둘레길 27㎞- 혼자 걷다①

 

딸내미가 월요일에 제주도로 들살이 가고 드디어 내겐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일주일 전부터 책도 사고 옷도 준비하고 배낭을 싸기 시작했다.

월,화에 있는 강의를 다 듣고 수요일 아침 구국의 결단을 하고 나서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서방두고 가는 미안함에 반찬이랑 밥이랑 국거리,과일이 좀 부족한 것 같아

아침 출발을 포기하고  수퍼에서 장을 더 보았다.

두세가지 반찬을 더 만들고 국도 넉넉하게 끓여 놓고 과일을 씻어놓고

10시 30분께 용산역으로 출발했다.

혹시 혼자여행의 두려움에 그냥 주저앉을까봐 한 시라고 빨리 떠나야한다며 KTX를 선택했다.

아침 버스로 갔으면 두번이면 도착할 일이 좀 복잡하게 되었다.

 

용산 - 익산 - 남원 - 남원시외버스터미날 - 인월 지리산안내센터

거의 처음 싸는 배낭짐이라 별로 넣은 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무거웠다. 한 5 ㎏정도.

기차에서 얼렁덜렁 싼 짐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아직 50% 밖에 파악이 안된 경로와 시간, 교통편을

책을 보며 꼼꼼히 살폈다.

 

지리산 둘레길 총 300㎞, 현재 갈 수 있게 개방된 코스는 70㎞

산을 수직으로 올라가는 게 아닌 수평으로 둘레둘레 걸어가는 길.

 

 

산이 보이고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이 펼쳐지면서

가슴에서 스멀스멀 지나간 여러 일들이 기어올라

꿈을 꾸듯 생각에 잠기곤 했다.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입을 다무니

혀밑으로 말이 고인다.

신맛, 짠맛, 쓴맛, 매운맛, 단맛

 

위액같은 신맛이

제 살을 녹여낸다.

 

간장같은 쓴맛이

내장까지 검게 물들인다.

 

토악질 끝, 담즙 쓴맛이

코안까지 비릿하다

 

아픈 맛, 매운맛이

입안을 통째로 마비시킨다. 

 

애인 혀같은 단맛이

물감퍼지듯 실핏줄까지 번져간다.

 

단전에  힘을 주고

깊게 흡을 한다.

 

대지의 바람이

온갖 맛을

손끝으로 날린다.

 

손은

그저

인생의 이런저런 맛을 

활자로 뱉어 내고 있다.

 

눈은

묻어둔 상처에 

가슴이 콕콕 찔려

물방울을 쏙 빼올리고  

있다

 

 

지리산안내센터 안 생태조형물 전시

 

지리산안내센터에 4시 30분에 도착. 예상대로 안내원도 걷기에는 조금 있으며 해가 지기에 애매한 시간이라 한다. 2시간 걷기 거리에는 숙박을 할 수 없는 마을이란다.

내 맘은 어두운 길이라도 그저 걸었으면 했지만 하는 수 없이 실상사를 둘러보고 매동마을이라는 곳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다 늦은 출발탓이오, 모질지 못한 내 인정탓이오, 그렇게 길들여진 나 때문인것을 어찌하리오.

 

지리산 실상사, '실상사 작은학교'라는 대안학교도 있는 것으로 아는 데 잘 됐다 싶었다.

큰 다리를 건너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연잎이 가득했고 간간이 하얗고 붉은 연꽃이 전등처럼 있었다. 동네며 절이며 지리산댐을 반대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고요한 암자 뒤에는 동네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공부방이 있었다. 눈이 파란 외국인 남자 선생님도 계셨다.  

실상사 앞 큰 하천은 맑고 시원스레 흐르고 있었고 나는 강을 끼고 매동마을로 걷기 시작했다.

여자 둘이서 혹은 남자 혼자서 , 걸어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갈림길에서 방향을 잡지 못해 트럭아저씨에게 물어보니 당신이 그 마을에 산다며 태워주셨다.

그 분의 안내로 마을 이장님댁에서 민박을 하게됐다. 아들 둘이 다 도회지로 나가고 이장님 부부와 꼬부랑 할머니가 같이 사시는 아담하고 깔끔한 집이었다.

할머니가 내다 팔 고추를 한 가득 다듬고 계셔서 나는 짐만 놓고 동네 한바퀴 구경한다고 나섰다.

마을 골목길은 참 정겨웠다. 감이 제 무게에 떨어져 터져 있었고 석류가 빨갛게 익었다.

석류를 좋아하는 미인, 우리 딸 떡순이가 생각났다. 제주도에서 잘 있겠지...뭐...

어느 대문을 지나치는데 대학생같은 처녀가 바닥에서 뭘 줍고 있기에 봤더니 눈이 마주쳤다.

나같은 여행자냐고 물었더니 실상사 작은학교 선생님이라며 그곳이 선생님들 기숙사라고 했다.

줍고 있던 대추 열알 정도를 주고 먹으라 했다. 얼굴이 말고 천진해 보였다.

뒷산 쪽으로 올라가니 마을도 훤히 보이고 앞에 지리산도 보였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져 바람소리가 시원했다. 노을빛이 구름에 퍼져 장관이었다.

더 어둡기전에 숙소로 돌아가려고 서둘러 도착하니 이장님 내외가 계셨다. 내외분도 내가 여자 (그것도 나이 좀 든) 혼자라 좀 놀라시는 것 같았다. 특히 사모님이^^

얼른 씻고 같이 저녁을 먹으며 40맞이 혼자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소박하고 정갈한 시골밥상은 참 담백했다.

한참만에 사람과 얘기를 나누었더니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아, 나는 말을 좀 하고 살아야 기운이 도는 성격유형인감???

 

내일 계획을 짜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낯선 곳에서 난생 처음 이렇게 혼자 자게 된 것을

대견해 하면서 한 편 신기해 하면서, 사실 좀 무서워하면서 잠을 청했다.

 

아, 정말 나 떠났구나. 이렇게 ~~

 

선운사 풍경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안식년 2학기

요즘은 블로그에 글쓰는 것도 뜸하고 그림도 뜸하고

사는게 뜸해진 것 같다.

 

8월 한 달 딸내미 방학을 맞아

많이 놀아주려고 국선도도 쉬고

에니어그램지도자 과정도 방학을 하고

꿈모임과 상담도 쉬었더니

정말 뜸해지는 생활이 됐고

몸무게도 좀 늘었다.

 

딸내미는 놀아준 게 없다고 투정을 한다.

방학내내 그래도 같이 있어줬는데

여행도 가고

(우리 가족끼리 간 게 아니라 다른 가족들과 함께 간 것이라며 강력히 항의를 했다)

 

결혼 10주년인 올해

쉬고 있으면 그동안 바빠서 못 본 것 실컷 보고

얘기도 많이 할 줄 알았는데

실제 생각만큼 그렇게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람관계라는 게

소통의 습관이 길들여져 있어야 하는데

그 길을 잘 닦아 놓지 못해서

좋은 기회인데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도 싶다.

 

9월,

에니어그램 지도자과정도 2학기 출발하고

10강짜리 무료문학강좌도 신청하고

다시 배움의 길을 나서야 한다.

설레이기도 하고

뭔가 미로에서 탈출해서 자유로워진 느낌이 들기도 하다.

 

가둬놓은 논에 물길을 트는 것처럼

그 동안 관심있고 호기심 있던 일들에 대해

굶은 사람 밥먹듯이

허겁지겁 달려드는 것 같다.

 

책보는 것, 그림, 심리, 영화, 글쓰기, 악기....

"네 마음껏 먹어봐"

누가 초콜릿이 가득담긴 접시를 주면서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난 반 년, 정확히는 작년부터

한 줄기는 나를 알아가는 내적 여정의 길을 걸어왔고

올해 들어서는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 내가 발현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보는 과정인 것 같다.

 

이 두 가지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글쓰기와 책, 그림 정도 인 것 같다.

그런데 글쓰기 공작소 저자의 5강에 걸친 글쓰기 강좌를 듣고 나서

나는 입도 막히고 손도 막힌 느낌이다.

잘 숙성해서 써야 한다는 무게가

편하게 말하거나 쓰거나 하질 못하게 한다.

선생님은 7년 동안 꾸준히 정진하듯 글을 써왔고 책을 읽어왔단다.

그래서 등단했고.

250여권의 책을 반드시 읽었으면 하고 추천목록도 올렸다.

 

오늘 다녀온 무료 문학강좌의 작가분은

신춘문예에 7번이나 낙방하고

공모작을 보낸 것도 잊고 있을 정도의 무렵,

꼬챙이처럼 바짝 말라가고 있을 무렵

연락이 왔단다.

 

역사속에 좋지 못한 모습의 문인들을 보면서

문학인들이 짊어져야 할  역사적 책임의 무게에

감히 엄두내지 못했던 글쓰기

 

왜 글을 쓰고 싶은가?

간절히 쓰고 싶은가?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내 안에 부글부글 거리는 그 무엇

내 안에 자욱한 안개처럼 깔려 있는 그 무엇

그것을 바깥으로 꺼내고 싶다.

 

살면서 생활하면서

어, 이거!

하는 모티브들을

허공에 날리지 말고

잡아 매서

붙잡고 그 끝을 보고 싶기도 하다.

 

가슴에서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머리에서 계속 뭔가를 하라고 하라고

어수선을 떨고 있다.

 

2학기

가을 바람이 벌써 분다.

 

 

 

2009년 9월 6일 일요일

그래, 존재와 문제는 구별해야 해. 알면서~~~^^홧팅

'나는 세 번 실패한 적이 있다'고 하는 것과 '나는 실패자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결과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 언어학자, S.I. 하야가와-
-------------------------------------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과 관련된 많은 기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 중의 하나가 문제와 존재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신경증적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문제와 존재를 동일시하며,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일수록 문제와 존재를 비동일시합니다. 여기에서 말한 비동일시(非同一視)란 엄연히 있는 문제를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되 존재자체로 확대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수능시험에 세 번 떨어졌다면 신경증적인 사람들은 ‘나는 실패자다’에 가까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반면, 건강한 사람들은 ‘나는 수능시험에 세 번 실패한 적이 있다.’에 가까운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결과적으로 신경증적인 사람들은 다른 영역의 시험까지 도전하지 못하게 되지만, 건강한 사람들은 수능에 또 도전하거나 다른 영역의 시험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할 때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거절을 당했을 때 자신의 의견이나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느끼지만, 신경증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거부당했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신경증적인 사람들은 먼저 제안하거나 부탁하는 것을 계속 피하게 되겠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에 부딪힙니다. 하지만 내가 문제를 만났을 뿐, 그 문제가 바로 ‘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나를 하늘이라고 비유한다면 그 문제들은 내 앞에 나타난 구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름을 보고 하늘이라고 할 수 없듯이 문제를 보고 ‘나’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부딪힌 문제와 당신의 존재 사이에는 칸막이가 있나요?

- 2009. 9. 3. '당신의 삶을 깨우는' 문요한의 Energy Plus [321호]-


2009년 9월 2일 수요일

오래만에 만나는 시

kbs 사장이었던 정연주씨가 mbc사장 엄기영씨에게 보낸 편지글을 오마이뉴스에서 봤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그 글 마지막에 담긴 시였다.

 

청년학도였던 시절, 일기장 한 켠에 적어놓은 시.

사회운동 단체 활동할 때 민중의 힘을 느껴보고 싶은 적마다 꺼내 읽던 시.

 

국민의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틀어막으려고

미친듯이 달려드는 이 정부의 언론완전정복 대작전 앞에서

외롭지만 의연하게 싸우다 물러난 장수가

남아 있는 보루인 성을  끝까지 지켜달라는

눈물어린 격려와 절절한 호소를 화살에 매어 쏘았다.

 

함께 싸우겠다는 병사들과 돕겠다는 주민들과 나서지는 못하지만 성원하고 있는

민초들이 있어 다행스럽지만

시절은 참으로 살벌하다.

정말 정권을 넘겨준 잃어버린 저들의 10년이 그리도 고달팠나보다.

다시는 주지 않겠다는 듯 무소불위로 종횡무진 칼을 휘두르고 있다.

기무사 민간인 사찰

먼 이야기이지만 참 가깝게 와 있다.

 

다시 읽는다. 이 시를..........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