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나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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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지고 왔던 것, 목숨처럼 존재의미처럼 생각해 왔던 것들을 털어버리려고 하니
왜 자꾸 이런 제목들이 내 시선을 머물게 하는 지 나도 모르겠당.
정말 호랑이처럼 혹은 산맥처럼 묵직한 느낌을 주었던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시집이 나와
도서관에서 곧장 신청하고 토지도 구입했다.
왜 자꾸 한 시대를 헤쳐나간 여성들에 대해 눈길과 맘길이 가는 지
이 또한 투사요, 여성으로서의 삶이 내 삶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너무나 강렬한 동료애, 동지애 때문일까.
선생님의 시중 마음에 와 닿는 시 두어 편을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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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갈대 꺾어 지붕 얹고
새들과 함께 살고 싶어
수만 리 장천
작은 날개 하나로 날아온 철새들
보리 심고 밀 심어서
새들과 나누며 살고싶어
수많은 준령 넘어 넘어
어미와 새끼가 날아 앉는 강가
밀렵꾼 손목 부러트리고
새들 지켜 주며 살고 싶어
전선에 앉아 한숨 돌리면서
물 한모금 밀알 하나 꿈꾸는 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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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갖고 있던 시집을 모교 대학도서관과 현 어린이도서관에 죄다 기증해서 없다. 시집도 간간히 읽어야 겠당.
하늘을 통째로 들어 날으는 듯이 고요하게 나는 높은 곳의 매처럼
언덕 위 길쭉하니 높이 앉아 숨막히는 긴장과 고고함을 자아내는 솟대의 새처럼
시는 모가지를 길쭉하게 들이빼고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관조의 세계, 정신의 세계로, 고독의 세계로 날 안내한다.
수 많은 말보다
절제된 단어, 속도, 음률을 통한 수 많은 무언의 말들이 그 속에 있다.
특히나 이 시집속에 있는 김덕용님의 그림은 볼수록 편하고 깊은 맛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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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
장마 그친 뒤
또랑의 물 흐르는 소리 가늘어지고
달은 소나무 사이에 걸려 있는데
어쩌자고 풀벌레는 저리 울어 쌓는가
저승으로 간 넋들을 불러내노라
쉬지 않고 구슬피 울어 쌓는가
그도 생명을 받았으니 우는 것일 게다
짝을 부르노라 울고
새끼들 안부 묻노라 울고
병들어서 괴로워하며 울고
배가 고파서 울고
죽음의 예감, 못다한 한 때문에 울고
다 넋이 있어서 우는 것일 게다
울고 있기에 넋이 있는 것일 게다
사람아 사람아
제일 큰 은총 받고도
가장 죄가 많은 사람아
오늘도 어느 골짜기에서
떼죽음 당하는 생명들의 아우성
들려오는듯......
먹을 만큼 먹으면 되는 것을
비축을 좀 한들, 그것쯤이야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지혜로 치자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탐욕
하여
가엾은 넋들은 지상에 넘쳐 흐르고
넋들의 통곡이 구천을 메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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