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31일 토요일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유고시집 중에서

"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 -박경리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나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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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지고 왔던 것, 목숨처럼 존재의미처럼 생각해 왔던 것들을 털어버리려고 하니

왜 자꾸 이런 제목들이 내 시선을 머물게 하는 지 나도 모르겠당.

정말 호랑이처럼 혹은 산맥처럼 묵직한 느낌을 주었던 토지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시집이 나와

도서관에서 곧장 신청하고 토지도 구입했다.

왜 자꾸 한 시대를 헤쳐나간 여성들에 대해 눈길과 맘길이 가는 지

이 또한 투사요, 여성으로서의 삶이 내 삶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너무나 강렬한 동료애, 동지애 때문일까.

선생님의 시중 마음에 와 닿는 시 두어 편을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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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갈대 꺾어 지붕 얹고

새들과 함께 살고 싶어

수만 리  장천

작은 날개 하나로 날아온 철새들

 

보리 심고 밀 심어서

새들과 나누며 살고싶어

수많은 준령 넘어 넘어

어미와 새끼가 날아 앉는 강가

 

밀렵꾼 손목 부러트리고

새들 지켜 주며 살고 싶어

전선에 앉아 한숨 돌리면서

물 한모금 밀알 하나 꿈꾸는 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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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

갖고 있던 시집을 모교 대학도서관과 현 어린이도서관에 죄다 기증해서 없다. 시집도 간간히 읽어야 겠당.

하늘을 통째로 들어 날으는 듯이 고요하게 나는 높은 곳의 매처럼

언덕 위 길쭉하니 높이 앉아 숨막히는 긴장과 고고함을 자아내는  솟대의  새처럼

 

시는 모가지를 길쭉하게 들이빼고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관조의 세계, 정신의 세계로, 고독의 세계로 날 안내한다.

수 많은 말보다

절제된 단어, 속도, 음률을 통한 수 많은 무언의 말들이 그 속에 있다.

 

특히나 이 시집속에 있는 김덕용님의 그림은 볼수록 편하고 깊은 맛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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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그친 뒤

또랑의 물 흐르는 소리 가늘어지고

달은 소나무 사이에 걸려 있는데

어쩌자고 풀벌레는 저리 울어 쌓는가

저승으로 간 넋들을 불러내노라

쉬지 않고 구슬피 울어 쌓는가

 

그도 생명을 받았으니 우는 것일 게다

짝을 부르노라 울고

새끼들 안부 묻노라 울고

병들어서 괴로워하며 울고

배가 고파서 울고

죽음의 예감, 못다한 한 때문에 울고

다 넋이 있어서 우는 것일 게다

울고 있기에 넋이 있는 것일 게다

 

사람아 사람아

제일 큰 은총 받고도

가장 죄가 많은 사람아

오늘도 어느 골짜기에서

떼죽음 당하는 생명들의 아우성

들려오는듯......

 

먹을 만큼 먹으면 되는 것을

비축을 좀 한들, 그것쯤이야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지혜로 치자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탐욕

하여

가엾은 넋들은 지상에 넘쳐 흐르고

넋들의 통곡이 구천을 메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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