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0일 토요일

왜, 어쩔래!

딸을 재우다가 잠들었다.

 

잠이 깨면서 여러 생각이 머리속을 휘돌고

 

결국 이럴바에야 일어나자 하고 일어나

 

머리맡에 놓여있는 옛일기장 연도별로 정리하고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밀린 메일과 블로그를 체크하고 있다가

 

또 이렇게 몇 자 적고 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100미터 달리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장거리 마라톤. ^^

 

직장인들이 금묘일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다.

 

몇 등으로 들어오든 역시나 결승점에 도달하고 나서

 

가뿐 숨을 몰아쉬고 내 뱉고 살 것 같은 휴식이 있기 때문이리라.

 

온 신경과 몸의 세포가 움켜진 주먹같은 긴장을 풀고

 

잠시 멍하니 그냥 있어도 되기 때문이리라.

 

주말에도 일하고 주중에 하루 쉬는 남편이 토요일, 일요일 쉬는 나보고

 

좋겠다고 했다. 마음이 쬐금 아팠다.

 

손가락 끝이 독하디 독한 세탁세제로 벗겨지고 해졌다.

 

몸무게도 5킬로인가 줄었다. (하지만 아직 적정 체중까지는 약 20킬로는 빼야한다)

 

남에 집에 맡겨둔 딸을 찾아 서방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집에 오는데 차 안에서 딸내미는 역시나 잠이 들었다.

 

그 사이에 남편에게 실핏줄이 타들어가고 간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 정도로 힘들다고 했다.

 

역시나 대답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며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일단 참고 경력 쌓는 셈치고 견뎌보라고 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그래. 맞다. 그래서 견디고 있다. 근데 힘들다. 그래서 하소연했다.

 

내가 말했다.

 

현실적인 경제적 문제로 취업은 했지만 이 일은 나랑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인생이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이왕이면 내가 잘하고 즐거워하고 할수록 더 잘하고 재밌고

 

열정이 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고.

 

그냥 그렇다고. 이왕이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남편이 마치 다른 세상으로 열린 창인 것처럼,

 

나는 남편에게 마라톤 뛰고 난 내 가뿐 숨을 내뱉었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인 것을 아는 이발사처럼 나는

 

남편이라는 대나무 밭에서의 임금님의 비밀을 고함을 친 것이다.

 

그냥, 여기까지면 됐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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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조금 천천히

그래, 이 현실에서 수천만번 점멸하는 내 자신을 그대로 느껴보자. 만나보자, 바라보자.

그래, 내 무의식의 패턴도 들여다보자.

 

그러나, 날  너무 몰아부치지는 말자.

 

애쓴다고, 긴장하지 말라고, 너무 애닳아 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부딪쳐 보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속삭여주자. 내가 나에게.

 

이 새벽마다의 시간이 육체적으로는 힘들게 할 지라도

내 영혼의 긴장을 풀어주고

내 정신의 공간에 가습기 같은 생명의 물기를 주는

그런 시간인 것 같다.

 

아마 이렇게 계속 일어나는 것은

 

내가 나를 위로하고

 

내가 내게 차 한 잔 마시는

 

그런 여유를, 대나무 밭을, 밭은 숨쉬기를 할 수 있게

 

내 내면의 내가

 

나를 인도하는 것이리라.

 

고마워. 나의 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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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든, 말을 하든, 생각이 나든 순간순간 떠오르는 장면을 그리고 싶다. 그림그리고 싶다.

 

춤추고 싶다. 온 몸을, 사지를 새처럼 펼치고 학의 모가지 처럼 늘이는 멈추기도 하고

 

뛰어오르고 수초처럼 너울거리는 영혼의 춤을 추고 싶다.

 

피리든, 해금이든, 악기의 선율에 긴 머리카락이 오선지 처럼 펼쳐져

어느새 나도 음표가 되어, 가락이 되어 너울 거리고 싶다.

 

아, 나는 정말 공상가, 망상가, 이상주의자인가?

이 비난이 내 한 쪽에서 올라온다.

 

책도 실컷 읽고 싶다.

 

몰라 몰라, 그래그래, 이게 나야, 전부 나야. 왜, 어쩔래!

2010년 2월 18일 목요일

딸의 독립.

딸내미를  대안학교로 옮기면서

그리고, 학교 끝나고 하는 방과후 교실이랑, 배우고 싶다고 시작한 피아노랑,

또 배우고 싶다고 하는 춤교실이랑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이 굵직하게 자리잡으면서

'아, 이게 생활이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이구나' 싶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취직도 한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학자금융자를 1%로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대학원 진학도 염두에 (많이 !) 두고 걍 눈 딱감고 취업했는데

 

애초 계획한 것들을 거의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 끝나면 (무조건 칼퇴근해서리..) 딸아이와 놀아주거나 그림그리기, 숙제도 좀 봐주기

딸내미 일찍 재우고 새벽에 일어나서 진학을 위한  공부하기.

 

하지만 칼퇴근은  마음뿐,  칼이 무뎌서 잘 잘라지질 않고, 쥐었다 놓았다 하기만 억수..

 

퇴근해서도 아이 찾고 집에 오면 저녁 먹이고 해서 벌써 8시가 훌쩍 넘는다.

눈에 밟히거나 처리해야 할 집안일과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뒤 엉키면서

10시가 넘게 되네.

그럼 아이는 잠을 재워야 한다.

 

요즘 딸내미는 독립을 위해 자기방에서 혼자 자는 연습에 들어갔다.

은근히 혼자 자는 것을 소외된다고 느끼는 것 같은 발언과 행동을 하면서

나름 자기자신에게 언니가 되는 과정이라며 받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잠재우는 과정도 침대에 누우라고 하고 불을 끄고

책상 전등만 킨 채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전형적인 잠재우기 엄마의 모습 ^^ 약간 뿌듯~~)

도서관 할 때 참석했던 세미나에서 얻은 세계 민담집(엄청 두껍다)을 두 세편씩 읽어준다

(사실 목 아프다. 하지만 내용이 재미있고 신선하기도 해서 다행이다.)

이래도 안 자면  등을 토닥이며 노래를 불러준다. 자장가.

그리고 다 잠이 들면 방을 나온다.

 

연습 초반 시기엔 가끔 새벽에 날 불렀다. 자기 방에서.

잠결에 못 들을 수도 있는데(당연하지 않은가? 울컥!)

딸내미는  날 부르다가 부르다가 점점 소리가 커지고

내가 알아채고 달려가 보면 화가 나 있다.

(내가 무슨 대기조이냐?)

달래느라 안아주고 노래해주고.....

 

독립시키기 쉽지 않다.

 

하지만 처음 며칠간은 아니, 지금도

내가 은근 걱정돼서 새벽에 일어나 딸방으로 가 보았다.

이불을 걷어 차서 감기 들까 걱정도 되고

안 자고 울고 있지 않을까 상상도 되고 (어려서 내가 좀 이러기도 한 듯 ^^)

 

사실은 내가 허전해서, 9년 동안 내 왼쪽 오른쪽에서 품고 잤던 딸내미가 없는

허전함이, 웬지 모를 미안함이 새벽에 나를 그 방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딸아이 저쪽 방으로 보내고

서방이랑 달랑 둘이 이불에 있는데

이것도 웬지 낯선 시추에이션. ^^

 

숨죽이고 눈치 살피며 번개같은 신속하게

본론중심, 핵심중심의 사랑을 가뭄에 콩나듯 나눴던 지난 세월이었는데

막상 둘이 있게 되었는데 웬지 서먹하고 내 뉴우런의 촉수들은

딸을 향해, 딸 방을 향해 미역줄기 처럼 하늘 거리고 따라가고 있다.

 

딸의 독립에 내가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

 

설 연휴 마지막날

가족회의를 진행하는 딸아이를 보며

많이 자랐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내 젖을 만지는 딸아이를 보면

아직도 애기구나 싶다.

 

3학년, 4학년, 늦으면 5학년

 

아마 이 이, 삼년의 시간이

딸내미가 나를 찾는, 내 품을 원하는 그런 시간일 것 같다.

또한 내가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되면 그것을 마치는 양의 시간이기도 하다.

 

콩나물에 물 주듯 매일 매일 아이에게 쏟아부어줘야 할 관심과 사랑. 그것을 싣고 가는 시간.

그리고 내 인생.

 

그 왼 발, 오른 발 줄타기를 잘 해내야 할텐데

 

지금으로서는

새로운 일에, 밥벌이 일만으로도  허겁지겁 대고 있다.

 

딸도 크고

나도 크고 있다.

 

나도 독립을 배우고 있다.

 

삶의 맞바람을 받으면서

서방의 등 뒤에 있지 않고 (좀 있어봤으면 좋겠다 ㅎㅎ)

오늘을 걷고 있다.

 

내 안에서 속삭이고 있는 열정과 느낌, 소망과 여러 이야기들...

 

그것은 어떻게 펼쳐야 할 지, 다시 냉동 보관해야 할 지, 그냥 비둘기처럼 날려 버려야 할 지.

 

주경효독의 자세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새벽에 펼쳐야 할 지.

 

암튼..

암튼...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나, 막걸리와 나.

막걸리 한 병하고 한 잔을 더 마시고

나는 목과 볼이 벌개졌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30분 점심밥시간 빼고 나면

난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다.

 

아이를 찾아 집에 빠르게 오면 7시 40분 정도

 

딸아이는 지붕뚫고 하이킥을 보겠다고 하고

나는 딸아이  저녁밥 준비를 한다.

 

파김치같은 몸과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마음은

술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간절하다.

 

그런데 왜 이런 걸까?

 

난 의식적으로는 술을 싫어한다.

술은 내 인생에 고통이란 이름으로 체크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아마, 무의식이 술을 찾고 있다.

익숙한 것일까?

몸에 배인것일까?

얼마전 딸아이에게

엄마 간이 너무 쪼그라져 있어서

막걸리 먹으면서 사알살 펴고 싶어

하며 막걸리 한 병을 샀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다.

간이 쪼그라들고

실핏줄이 타는 느낌이 바로

긴박한 직장의 느낌이다.

 

왜 이럴까,나는

왜 이럴까, 나는

 

오늘 딸내미를 찾아 오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태어난서

강한 충격이 있었던 3살부터

철들어 가던 10살까지

약  7년간

나는

어린 나는

불안과 공포와 체념, 무기력함과 외로움이

오래오래

가랑비처럼

점점 점점

내 몸에

내 땀구멍을 통해 온몸으로

내 머리위의 머리카락 뿌리를 통해 뇌로

스며 들고 있었던 것 같다.

 

3살부터....

 

여름이면

장마철이면

노점에서 과일을 팔던 엄마는 옥수수를 삶아 함께 팔았다.

그러면 어느 날

어느 비오는 날

아버지는 술이 잔뜩 취해서 와서 엄마의 그 옥수수 통을 발로 차서

길바닥에 나뒹굴게 했다.

 

그리고 줄무늬 초록빛 수박도 발로 차서

버얼건 속이 터진 머리통처럼 드러나게 했다.

 

나는 여름이면 그런 모습을 자주 봐야 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네.

 

난 옥수수를 봐도

수박을 봐도

그리고 비를 봐도

그 생각이

그 장면이 떠오른다.

 

내가 병든 것일까?

아니, 난 건강하게 잘 자랐다.

그나마, 교회와 그리고 캔디를 닮고 싶었던 귀엽고 야무진 내가, 내가 있어서.

 

하지만

그 슬픔은 내 가슴에, 내 몸에 남아있다.

 

지금,

무의식의 때에

그리고 다시 그 두려움과 불안이 옛 기억을 두드리며 쳐 댈때

나는 그 느낌과 공포로 몸이 긴장하고 움츠러 드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알고 느끼고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어른이 된 것이다.

 

눈물이 잠깐 났다.

그 때의 두려움과 불안의 감성이

아직도 내 가슴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이리라

 

계속 녹고 있다.

계속 녹아 흐르고 있다.

그 당시의 슬픔이

 

나는  보고 다시 느끼고

 

그리고 떠나보내고 있다.

 

커가고 있다.

 

슬프고 가여운 어린 시절의 나를

어른인 내가

아주 훌륭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구나 하고 떠나보내고 있다.

 

그래.

그래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새벽에 서류와 책을 보다가

10.02.08  05:30

 

내 머리속에 폴더를 만든다.

만들고 싶진 않다.

무수한 폴더가 있기에.

또 무슨 폴더냐고 누군가, 어디에선가 뭐라고 해대고 있다. 초자아?

 

그런데 맘과 생각이 복잡하고 불편해서 만들어야겠다.

이 고요한 시간, 나를 느끼고 내게 올라오는 것들을

그리고 쓰고 싶은데

나는 잠자고 있는 딸 옆에서

정부지침서 400쪽 짜리를 읽고 있다.

 

전체적인 파악이 안되면 ,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완전한 이해가 아닐지라도)

이리 답답하고 불안할까?

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이라 더 그러하겠지. 누군가 피해자가 생길까봐, 책임질 일이 생길까봐?

 

지침서를 읽으면서도 '왜?' '무슨 목적이지?"

하는 의문이 든다.

새로 생성되는 폴더에는 전체뼈대와 내용이 담긴 매뉴얼이 들어가고

이를 토대로 나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지도map를 만들어 가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 폴더는 설 다음부터는 회사에서만 열어 볼 것이다.

집에서는

하고싶은 공부와

딸과의 시간을 (서방도 가능하면....)

보내야지.

 

그림을 같이 그리기로 했는데

아직도 못하고 있다.

 

회사 적응기라서.

딸이 문자로 '엄마 일 잘해, 사랑해, 홧팅' 하고 보낸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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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10  05:00

 

아들러.

애쓰고 산 사람이구나. 열등감을 승화시켰구나.

 음악을 즐기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좋아했다니

약간 멋도 아는 심리학자였으려나.

산책하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었다지.

그래.... 갑작스런 죽음을 준비해야돼......

 

유언준비

그리고 삶을 좀 정갈하게... 공간도 좀 정갈하게..

살아보니 그닥 많은 것이 필요하진 않잖아.

옷장 가득한 옷.

낡아서 그렇지 아직 10년이상 입을 만하고

내가 갖고 있는 악기 : 해금, 피리, 기타, 하모니카, 트라이앵글, 캐스터네츠, 오카리나, 전자피아노, 수선맡길 바이올린,

많네, 인생을 즐길만한 것도.

 

그래 준비해놓자.

사랑했다고. 모두들.

 

공부하다가  이게 웬 진중함 ^^

 

왜 이리 새벽에 일어날까?

적정량의 고요함과 들여다보기의 내면의 잔에 채워져야 하는 걸까?

 

2010년 2월 4일 목요일

나 안아주기



유학파 요리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도시 식당 주방은 요리사들이 서열 싸움을 벌이는
살벌한 전쟁터랍니다.
국자로 뒤통수를 때리거나 발로 차는 건 약과고
뜨거운 기름에 침을 뱉어 일부러 튀게 하거나
도마질을 할 때 실수인척 툭 쳐서
손가락을 썰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네요;;
주방장에겐 ‘예스, 셰프’ ‘땡큐, 셰프’만을 외쳐야 하고
동료들과는 약육강식에 가까운 서열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래서이겠지요..
30대 초반에 세계적인 요리사의 수제자가 된 한국의 한 젊은이는
셰프가 된 후 자신의 주방에서 금지하는 일 중 하나가
자신에게 질책받은 요리사를 동료들이 위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네요.
강해야만 살아남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의 경험칙이 더없이 착잡하고 좁게 느껴집니다.

살다보면,
사격장 안전수칙처럼 꼭 필요한 통제도 있겠지요.
문제는 20만큼의 통제만 필요한데
습관적으로 50이상의 통제를 요구하면서
불필요한 억압과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방이 전쟁터 같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요리가 나올 수 있다는 식의 지레짐작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미리 포기한 적이 있다면,
괜한 짓 한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진보적인 요리사의 말처럼 만든 사람의 마음이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좋은 요리가 나오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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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날아오는 정신과의사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이다.

여러 정신과의사들 중 여자라서 그런 것 아닌 것 같고

이 사람의 가치관과 생각이 내 코드에 맞는 것 같다.

 

어떨결에 직장에 다니게 되니 순간순간 많은 생각과 느낌이 지나간다.

바빠서 그것을 간단하게라도 적을 시간이 없지만.....

 

사람, 일과 노동, 효율, 책임, 인생..

 

많은 단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휙 왔다가 휙 사라진다.

 

나 끝까지 외치고 싶은 것일까, 증명하고 싶은 것일까?

 

앞 글의 끝부분처럼

 

결국 사랑이, 긍정적 수용과 격려, 다양성의 인정과 장점의 발견과 계발이

 

회오리같은 단어들이 답이지 않을까.

 

왜 자꾸 답을 찾는 것일까.

 

칼끝처럼 날카롭고 얼음처럼 차갑다고 느껴지는 현실에서

 

아파하거나 추워하고 있나?

 

괜찮아, 괜찮아. 사랑해. 사랑해.

 

2010년 2월 2일 화요일

사람을 믿는다는 것...

어제 일하시는  요양사 아주머니들(이하 여사님들) 두 분과 인천구치소에 다녀왔다.

 

젊은 시절 선후배 시국사건으로 인한 빵바라지(책과 기타 필요 물품을 수감자에게 넣어주는 면회 접견의

 

 속어 정도? ^^),   혹은 항의시위를 하러 온 적은 있지만

 

이런 묘한 일로 오기는 처음이다.

 

사연인즉슨, 간질과 장애가 있는 두 대상자에게 돌봄서비스를 해오시던 두 요양사 여사님들이

 

어떤 사건인지는 잘 몰라도 두 대상자가 사건에 연루되어 구치소로 가게 되자

 

돌봄서비스와 각종수발을 구치소로 가서까지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돌봄서비스는 대상자가 있는 가운데 제공되어야 하는데

 

대상자들이 구치소에 갔는데 어떻게 제공할 수 있느냐며 결제(서비스 제공후 전산시스템으로 결제를 한

 

다)를 한 여사님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공무원들도 사회복지관련자들도 여사님들의 구치소 수발 사실을 믿지 않았다. 병원가서 약도 타다 주고

 

없는 집에 가서 집도 치워 주고 한 사실들을 쉽게 믿지 않았다.

 

직업을 넘어선 인정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 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다.

 

내가 입사하기 전 벌어진 일인데

 

담당자가 되어서 모시고 가게 되었다.

 

면회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나 또한 묘했다. 나 또한 진짜 하셨을까 싶었는데 함께 길을 나서고

 

생각보다 많이 면회를 하고 수발을 하신 사실을 보면서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되돌아 보게 되었다.

 

여사님들 자신들이 어려운 형편에 자식을 길러보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지내셔서 그럴 수있는 것일까?

 

왜 갑자기 마음속에 '민중의 여러 속성'이라는 단어가 스쳐가는 지 모르겠다.

 

다들 대학생, 또는 고등학생 자녀들 둔 절실한 상황의 여사님들이라

 

그런 것일까도 생각해보았다.

 

여하튼

 

노동과 생계와 인정.

 

인간이 갖고 있는 다양한 모습.

 

여러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다.

 

 

 

일 마치고 오는 길에 차에 길가에서 갑자기 섰다.

 

기름이 바닥나서 그랬던 것이다.

 

누가 타고 기름을 안넣어뒀어! 화가 났지만 여차저차 긴급출동 부르고

 

사비로 좀 더 넣고 해서 회사로 들어왔다.

 

큰 도로에서 멈췄으면 세 여자가 큰일 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