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27일 금요일

11년된 벗, 세탁기 거름망을 청소하면서...

99년에 결혼했으니 이 세탁기도 벌써 11년이 되었다.

우리딸보다 1살 더 많다.

자취할때 제일 아쉬운 것이 바로 세탁기였다. 23살부터 자취했으니 7년동안은 손으로 빨고

근처 빨래방을 이용했다.

결혼하면서 번쩍 번쩍 10킬로 짜리 세탁기가 '마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며 내게 왔다.

 

요즘 들어 빨래를 하면 옷에서 약간 쾌쾌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바쁘게 살다보니 세탁기 돌려놓고 제 때 꺼내서 얼른 널지 않아서 그럴까나 싶어서

부지런을 떨어 보았지만 별 변화가 없었다.

세탁기를 열어 먼지를 모아주는 거름망(?)을 보니 농축된 먼지덩어리가 회색빛을 띠며

곰팡이와 먼지가 결합된 안 좋은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먼지를 꺼내고 다 쓴 칫솔로 망을 긁어낸 뒤 향좋은 비누로 빨았다.

칫솔질을 하면서

'11년 결혼생활에서도 이렇게 찌들고 농축된 삶의 찌꺼기들이 있을 텐데....

나 자신에게도 이렇게 찌든  오래된 찌꺼기들이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남편은 이 거름망을 청소한 적이 있을까 싶었다.

빨래를 돌리기보다 더 힘든 게 널기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름망도 청소해줘야 한다.

갑자기 딸내미 다니는 학교에 집안의 각종 가전제품이나 생활제품 사용법을 배울 것을

건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내미 학교에는 복사기 사용 자격증 시험(1.2급) 스캐너 사용 자격증 시험 등이 있다.

이 참에 숙제로 '자기네집 세탁기 기종 알아오고 사용법 익히기, 빨래  5번 이상 하기.'

뭐 이런 과제를 내 달라고 요청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청소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아이들도 많단다.

우리 아이들이 결혼을 하든 안하든 스스로의 삶을 알아서 꾸려갔으면 한다.

특히 남자아이들이 소홀하기 쉬운 게 일상생활, 집안일 부분이다.

발도로프 학교나 대안학교에서는 그래서 요리나 농사, 수공예(뜨게실, 바느질, 옷만들기,가방만들기..)

를 배운다. 목공도 하고(숟가락, 밥그릇, 책꽂이, 고학년때는 악기도 만든단다. 기타 같은 것을! 헉!)

살림과 지식이 잘 어우러지고 과학과 예술을 그 안에서 발견하고 느끼고 배웠으면 좋겠다.

 

세탁기 거름망 청소를 하면서 든

내 짧은 생각이다.

속이 다 시원하다.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일기

딸내미 학교 근처로 이사와서

학교 학부모 한 가족과 함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낮에 서울 엄마네 가서 반찬과 먹을 거리를 받아왔다.

김서방 주라고 엄마는 반찬그릇에 곱게 담아서 주셨다.

이웃 학부모 부부는 맥주를 사 가지고 왔다.

밥을  차리는 동안 컴퓨터를 고쳐주었다.

컴퓨터가 더위를 먹었는지 어찌되었는 지 남편이 한 번 손을 봤는데도

다시 안된다.

 

정말 고마웠다.

몸체를 뜯어 내장까지 다 살펴봐줬다.

아직 내가 못하는 수준이다.

 

아이들 교육에 대해

영어교육을 비롯한 외국어 교육,

음악교육을 비롯한 예술교육에 대해

우리 학교의 상황을 돌아보는 얘기를 나눴다.

 

오후에 그 집 아들네미와 우리 딸과 나랑 공원에서 실컷 자전거를 탔기에

몇잔 안 먹었는데 거나해졌다.

 

그집 식구들이 돌아가고

뒷정리를 하고

딸내미에게 일기를 쓰자고 했다.

딸이 은근히 싫어하는 눈치였다.

일기장을 학교에 숙제로 냈다고 했다.

내가 다른 공책에 쓰라고 하면서

"이 다음에 네가 어른이 돼서 '아, 내가 3학년때 이런 생각을 했고, 이렇게 놀았구나

나는 이런 면이 있던 아이였구나' 하고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추억의 선물이 바로 일기야."

애기해줬다.

 

그랬더니 엄마는 쓰냐고 했다.

 

그래서 책방에 가서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책꽂이를 뒤지며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의 그림이 그려진 내 일기장을 기어이 찾았다.

8월 2일까지 썼다.

 

같이 일기를 썼다.

 

시도 썼다.

딸내미에게

오늘 자전거 탔던 기분이나

엄마가 탔던 모습을 시로 써보라고 했다.

 

야호~하고 두 팔을 하늘로 벌리고 자전거를 타는

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엄마

 

천하무적

우리엄마

하지만

바람, 공기

앞에선

한업시(없이)

약해짐니다

나도 나만의 자유를

느끼고 싶습니다.

 

라고 썼다.

 

잘썼다.

역시 우리딸이라고 칭찬해줬다.

그림도 잘그렸는뎅..ㅎㅎㅎㅎ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고

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더니

오늘 개학날 학교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자전거를 타니 정말 행복하다.

산 밑이라 kt 밖에 들어오지 않아 인터넷  신청을 했더니

자전거를 선물로 줬다.

 

내 자전거가 되어서

저녁에 많이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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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24

 

딸하고 일기를 함께 쓴다.
딸이 내가 자전거를 타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나도 그렸다.

 

며칠 너무 행복하다.
이 행복,

내가 가질 수 있는 지

가져도 되는지 또 누구에겐가

무엇엔가 묻고 있다, 답을 구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하고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지못하고

이렇게 주저하고 의심하고 있다.

 

난 이사와서

예현이에게

밥을 해주고

예현이를 도서관에 보내고

예현이가 집에 오는 것을 맞이하고

예현이와 자전거를 탔다.

 

바람이 우리 머리칼을 빗겨주고

바람이 젖은 우리 몸을 말려주고

바람이 싱싱한 산소를 우리 폐로 불어 넣어 주고

나무가 녹색향기로 온 몸을 감싸준다.

 

우린 나무가 되었다

우린 호수가 되었다.

 

난 내가 꿈꾸던, 내가 바라던,

엄마가 된 것 같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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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에서

아프로티데에서

데미테르가 된 것일까.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이 행복.

다시 일터로 나가야 하겠지.

다시 전사로  나서야 하겠지.

 

 

 

 

 

2010년 8월 15일 일요일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다.

지난주 화요일 비를 맞으며 이사를 했다.

딸내미는 4박5일 지리산으로 캠프를 가고

손가락 수술을 받고 아직도 붕대를 감고 다니는 서방이 하루 휴가를 내서

드디어 평생 뿌리를 내리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들어왔던 이 곳,

결혼생활 11년을 보낸 인천의 북쪽을 떠나

딸내미 학교가 있는 남동쪽으로 옮겼다.

 

불타는 청춘의 사연과 활동이 새록새록 영사기 필름 돌아가듯

머리속을 스친다.

지역 거점, 주민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낮고 깊게 지역주민속으로 스미고자 했던 시간들.

일점돌파.

한 곳에 역량을 총집중해서 모델을 만들고 모범으로 승화해서 다른 곳으로 전파하는

그 한 점. 그 한 곳.

어느덧 10년이 지나고 공부방, 도서관, 복지시설, 단체들이 많이 형성되고

이제 드디어 진보와 개혁을 바라는 정치인들도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많은 것들이 움직이는 도심 한 복판에서 살다가

이젠 새소리가 나고 텃밭이 보이고 담장이 낮은 주택들이 있는

조용한 이 곳으로 이사를 오니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다.

 

오직 딸내미가 학교를 걸어서 가게 되었다는 점.

인천대공원이 바로 옆이라

좁은 집이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아주 큰 정원을 갖게 되었다는 점.

청소년수련관이 있어

값싸게 체육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빈약하지만 도서관도 드나들 수 있다는 점.

 

이것이 이사 오면서 얻게 된 행복들이다.

 

새벽에 공원에 나가보니

노부부가 인라인을 타기도 하고, 자전거를 함께 타기도 했다.

보기 좋았다.

 

이사 오면서 남편은 떼어 놓고 오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들면서 뭔가 일을 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해서

걍 뒀다. ㅎㅎ

남편도 직장이 가까와져서 심리적 육체적 부담도 조금 준 것 같고.

남편에게 있다는 삼재의 기운이 이사로 좀 더 잘 풀려가길 내심 바라고 있다.

 

딸내미 3학년, 4학년,5학년,6학년.

3-4년은 이곳에서 살아야 할 것 같다.

살던 곳보다 작은 집으로 왔고

오래된 가구들을 버리고 와서 알맹이만 있는 셈이라

버리고 정리할 것들이 많다.

언제 이렇게 사들였는지 모르겠는데

버리려니 많은 생각과 판단을 하게 된다.

 

 

 

물건이든 마음이든 정신이든

버리는 것이 쉽지가 않다.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삶

그닥 많이 새롭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뭔가 기대해본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 갈 것이며

어떤 것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