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초년 시절 한덩치와 한 눈빛때문인지는 몰라도 일찍부터 총학생회장 가드(가이드, 수행비서 정도?)로 조국과 민중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지어온 우리 남편.
가슴아픈 역사와 현실앞에 도저히 책을 잡을 수 없었던 그는 공돌이 2학년을 끝으로 이른바 학사제적을 당했다. (학교생활 6년 토탈 24학점 이수)
2학년때인가 그 당시 밥먹듯 학교를 침탈해서 총학생회장을 검거해 가던 이른바 백골단이 드뎌 울 학교를 새벽어스름에 쳤을 때 그는 충실한 가드로서(자기 말로는 머리가 있는^^) 사력을 다해 피신을 시키고 평상시 잘도 뛰어내리던 학생회관 3층에서 뛰어내리다 잘못돼서 한 쪽 발목이 나갔다고 한다.
(가슴아픈 사실은 그 때 그리 지켰던 총학생회장이 십여년 뒤 한나라당 선거사무장으로 남편이 일하던 민주노동당 지역에 왔다. 원래 자기 표현이 적은 사람이지만 직접 만날게 될까봐 안보려고 애쓰는 듯하게 느껴져서 내 맘이 더욱 아팠다)
몇번에 걸친 수술로 그냥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조금 많이 걷는다 싶으면, 겨울날 아침이나 비오는 날이면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를 못한다. 장애인이다.
이른바 청천벽력같은 일대 사건에 아버님의 큰아들에 대한 마지막 꿈과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회복하러 남도 끝 고향 완도에 와 있는 아들이 어지간히 밉기도 하고 안됐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독한 맘 먹고 나머지 두 아들을 이런 악에서 구하고자 나중에는 터줏대감,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만인의 인정을 받으시던 완도 고향마을의 청년회장을 접고 광주로 이사를 감행하시기까지 했다.
경당에서 장비가 휘두르던 월도(긴 장대가 달린 칼인듯)를 다뤘다는 남편은(날렵했다는 얘기를 엄청 강조하면서) 오랜 치료와 회복기간을 거쳐 0.1톤이 넘는 거구가 되었던 것 같다. 1학년때 증명사진을 가로로 많이 늘린 모습이 내가 만났을때의 모습이다.
그 당시 많은 학생운동권이 그렇듯이 부모님의 눈물과 호소어린 회유, 폭력행사까지에 이르기도 하는 협박을 외면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부족한 한 힘 보태고자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후배양성과 사학비리 온상인 대학을 정상화 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그리고 재야단체 상근 일꾼으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 딛게 된다. 그 당시 봉급은 없고 교통비와 생활비는 새벽 세차였다. 그래서 나오는 월급은 30만원. 남편, 부인, 자식들까지 한 집에 두 대에서 세 대 이상 차가 있는 그런 아파트에서 2년 가까이 새벽세차를 했다. 어떤 날은 전날 뒷풀이를 늦게까지 하고 일어날 자신이 없어서 세차하러 갈 때 타는 버스 정류장에서 잤다고도 했다(정말 무식했다. 젊었던 것일까?)
그렇게 청년시절이 보내고 결혼하고 민주노동당에서 일할 때 소위 '민주화보상법'이 만들어지고 남편에게 1억 5천만원의 돈이 나왔다. 발목병신 된 값이라고 누군가 가슴아파 하면서 얘기했다. 남편은 혹여 시댁어르신들이 알면 이리저리 갈등이 생길까봐 말하지 않았다. 우선 1억은 공동체에 기증했다. 3천은 사람 좋아 카드 빚을 내서 돈을 빌려주고 막 쓰던 둘째의 빚을 갚아주고 신용불량자를 면하게 해주었다. 천 오백만원은 피땀흘려 겨우겨우 마련해 쌀농사를 지어먹는 완도섬 손바닥만한 논을 막내아들 등록금때문에 팔아야 하는 사정에 눈물흘리시는 어머님을 보고 내가 드리자고 했다. 나머지 오백은 공동체에서 공동육아 어린이집 만든다고 출자금 모을 때 빌린 대출금을 갚는데 썼다. 1억 5천 큰돈이기도 하고 금방 사라지는 작은 돈이기도 하다. ^^
둘 다 돈 개념이 없기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돈이기에 그냥 우리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 1억으로 장학금을 만들거나 대안학교를 만드는데 썼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공동체에서 어떤 사업에 1억을 함께 넣었는데 사업이 제대로 안돼 정리하면서 남편에게 일부 돈을 돌려줬다. 남편이 그것으로 시작한 것이 2년동안 한 유기농매장이다.
난생 처음으로 자영업자, 이른 바 사장님이 된 것이다. 한 5년 넘게 해 온 민주노동당 간부를 정리하고 자영업자가 된 것이다. 유기농매장을 한다니 나도 내심 좋아는 했다.(이왕이면 하는 일이 진보와 좋은 세상 만드는 여러 영역중에 하나였으면 하는 바람이 나에게 많았기에)
하지만 과정에서 기획부터 여러가지 것들을 나와 나누지는 않았기에 난 좀 서운해하고 있었고 그 간 살면서 쌓인 여러 감정땜시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나또한 민간어린이도서관을 만들고 운영하는데에 온 힘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난 우리가 바라는 대안의 삶, 대안의 세상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남편이 현실경제를 피부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나 또한 실물경제나 현실경제를 잘 알지 못하고 늘 최저생계비 이하의 경제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주식이나 기타 여러가지 경제흐름은 학습을 통해서 알아가는 상태였기에.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어차피 선택한 자발적 가난의 삶이기에,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여겼기에..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말 좋은 태도는 아닌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생활하고 살아가는 그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민주노동당 간부였고 현재 당원이기도 한 그가 가게를 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삶에 밀착해 갔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유동인구를 비롯한 입지조건을 정확히 좀 파악했어야 했고 유기농시장의 특성과 현실을 더 파악해야 했던 것 같다. 남편도 우선 다른 사람 가게에서 일을 배우고 결정할 것을 그랬다고 정말정말 듣기 어려운 후회, 안타까움이 섞인 얘기를 처음 했었다. 딸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난 주로 재고 처리반이다) 했지만 현실은 현실이고 생활은 생활이다. 12시간 꼬박 일하고도 남는게 별로 없다면 어려워지고 일하는 사람도 지치고 나중엔 화도 나게 된다. 남편의 느긋한 성격이어서 그럭저럭 지냈지 나였으면 제 풀에 지치거나 속상해서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장사꾼 똥은 개도 안먹다는 말이 있다. (왜? 속이 새까맣게 타서 똥도 먹도을게 없단다. 순대국 장사하는 울 친정엄마 말씀. 아무래도 사위를 위로하려는 말씀아닐까 싶다)
정리되면 어떤 결과가 남을 지는 잘 모른다.
인생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빛날때가 있으면 침잠할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내 안식년이 맞물려 경제활동을 안하는 상황이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저 김사장 잘 정리하고 잘 평가하고 잘 쉬었으면 좋겠다.
한 두어 달 어디 처박혀 공부하면서 앞으로를 설계해보고 싶다니
그러라고 했다. 못다한 공부 몇 달 해보는 것도 괜찮고
쌀 있고 김치 있고 딸내미 학비 낼 약간의 돈이 있고 .........흑흑
사람이 중요하다.
정 안되면 식당일 하든지, 알바하든지 뭐 무슨 수가 있을 것이고
평생 한 방향만 향해 뛰어 왔던 그 사람.
뛰느라 가슴 속 느낌과 울림을 듣지 못했고 (특히 옆에서 날 좀 보라고 외쳤던 마눌님 소리도 못듣던^^)
차분히 앉아 외부의 요구만이 아니라
자신의 요구, 제 스스로의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던 그이였기에
그럴 시간이 필요하다.
딸내미 뱃속에 있으면서 선거에 선거를 준비하고 거쳐온 그 숨막히기도 한 시간들.
벌써 아홉살인 딸과도 진한 부녀지간의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갖기를 소망한다.
불길처럼 활활 타면서 다툴 적도 있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지구를 살리고 싶고 다음세대를 위하는 그런 선한 마음 가진 사람이기에
그런 점을 무척 존경했기에 선택했던 동지였고
진보의 삶을 부족한 힘이지만 보태가면서 만들어 가고 싶었기에
더욱 높은 기대를 하고 때론 의존하려고 했기에
더욱 실망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머리속 진보는 몸과 뼈에 새겨진 5천년 넘는 가부장제와 온갖 시대에 안맞는 고정관념의 유전자를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수용하기로 하면서
나 또한 그 사람의 기대와 바람을 채워주기엔 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하면서
그러므로 그러면서 꽁꽁 매어놓은 뭔가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와 졌기에
그도 그런 시간을 가져으면 한다.
그 첫마음
그 연한 새순같은 마음
다시 들여다 보는 시간
가지시길
온 맘으로
바란다.
제 몸 속의 샘물이 가득차야
남에게 퍼 줄 것도 있다.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은 가슴을
벅벅 긁어봐야
생채기만 깊어진다.
고일 때까지
기다리고
생채기는 새살이 돋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우리가 인간으로 풍성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려면
이젠 자기를 돌아보고
감사의 마음이 차오르는
그 소중한 기쁨의 경험을
해야한다.
결승점은 출발점이기도 하다
애써온 그에게 박수를
톡톡톡 어깨를 두드려준다.
너무 좋은 글이네요. 코끝이 찡해 옵니다...
답글삭제제가 원래 글 읽는 속도가 엄청(?) 느린 편인데,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거든요).. 단숨에 읽어내려갔네요. 음, 용기 있게 사시는 두분이 부럽기도 하고 그러네요. 풀 하우스에서 송혜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아자~ 아자~ 화이팅!!'
답글삭제"아자~ 아자~ 화이팅!!" 입니다. ^^
@CK - 2009/05/26 11:19
답글삭제별 말씀을요.쑥스럽네요^^
@회색웃음 - 2009/05/26 23:16
답글삭제반가워요.복구는 잘 되가시는지요.백구머리요, 저도 한 번 해보고싶어요.^^ 근데 착한아였는지 뒤통수가 밋밋해용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