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9일 금요일

편히 잠드소서.....

오랜만에 시청광장이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네요.

노오란 풍선, 노오란 종이비행기, 노오란 장미.... 희망을 뜻하는 노오란 것들의 천지입니다.

저도 어려서 노오란 셀로판지로 세상을 바라보길 좋아했어요. 따뜻해보이고 외롭지 않고 그런 느낌....

 

어제 저녁 당신의 고향생활을 담은 영상물을 텔레비젼에서 봤어요

그냥그냥 손으로 빗어 올린 올빽머리, 미숫가루색 작업용 잠바.

어디서 본 듯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아버지 모습이더군요.

'일할 때는 욕하시더니 노니까 좋아해준다'며 방문객들에게 농담반 진담반 담아 얘기하는 모습 .

참 솔직하더군요. 저녁에 부인이랑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모습도 한가로워보였고

방문객들과 김치안주에 막걸리 나누는 모습도 정말 동네 아저씨더군요.

행복해 보였어요. 정말로.

 

그렇게 그렇게 남은 시간들 그리 좀 쉬면서 지냈으면 좋았을텐데

그 영상물을 보니 더욱 맘이 아팠어요.

몇가지 의견은 달라 서운하고 이해안되고 안타까웠던 게 사실이지만

취임할 때부터 내심 기대가 참 많았습니다.

 

스무살때부터 내가 찍은 대통령은 한 번도 된 적이 없지만

당신이 대통령이 된 것은 김대중씨가 된 것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었고 기대였습니다.

그가 물줄기를 바꾸었다면 당신은 깊고 넓게 바닥을 파면서  힘차게 흘러흘러

온전한  강이 되기를 희망했던 것 같아요.

 

사람이란 그저 그냥 보면 다들 다를 것 같지 않지만

차별, 빈곤, 불평등, 착취, 소외.... 이런 것들 모든 사람이 다 싫어할  것 같지만

그래서 대부분 한 마음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현실을 까고 보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이 무서운 현실이고

온전한 강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그런 당연한 세상 만들기가 절대 만만치 않다는 것

절감에 통감까지 다시  절망합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고향마을 뒷산에서 몸을 던졌던 그 시간부터

사람이란 그저 그냥 보면 다들 다르지 않다는 것

밑바닥에서 자기힘으로 일어선 사람,

바보소리 들어도 무던히 자기 길 가는 사람,

온갖 권위주의와  고정관념, 위선, 체면치레 이런 것보다는

수수함, 소박함, 자연스러움을 좋아했던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

고단한 여정인 줄 알면서도 쉼없이 자기수양을 하면서 맨발로 성장해 온

한 인간의 인생역정을, 그가 추구하던  가치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것.

모든 고통을 가슴에 안고 생을 마감한 그 마음을 위로하고 슬퍼하고 있다는 것 .

절감에 통감하면서 다시 희망합니다. 마음이 조금 환해집니다.

 

사람답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

사람사는 세상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권력으로 가로막고 잡아가고 있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무소불위의 공권력으로

민주와 인권, 생존, 생명의 모든 인간적 가치들을

무참히 짓밟는고 있는 이 때

 

이 어둠을 걷어낼 수 있도록

모인 사람들이

안타까와 하는 사람들이

슬퍼하는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다운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

서로 위로 받고 격려하며 힘을 내야 겠습니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자루안의 서 말 구슬들이 아니라

짱짱하게 꿰어져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보배를  만들어 봅시다.

 

노오란 종이비행기가

사람들 사이를 날아다니며

한땀한땀 엮어 가는 걸

상상해 봅니다.

당신의 뜻도 이러하리라 생각합니다.

 

편히 잠드소서.....

 


 

 

 

 

2009년 5월 26일 화요일

2년의 자영업자, 이른바 사장생활을 접는 서방

대학 초년 시절 한덩치와 한 눈빛때문인지는 몰라도 일찍부터 총학생회장 가드(가이드, 수행비서 정도?)로 조국과 민중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지어온 우리 남편.

가슴아픈 역사와 현실앞에 도저히 책을 잡을 수 없었던 그는 공돌이 2학년을 끝으로 이른바 학사제적을 당했다. (학교생활 6년 토탈 24학점 이수)

 

2학년때인가 그 당시 밥먹듯 학교를 침탈해서 총학생회장을 검거해 가던 이른바 백골단이 드뎌 울 학교를 새벽어스름에 쳤을 때 그는 충실한 가드로서(자기 말로는 머리가 있는^^) 사력을 다해 피신을 시키고 평상시 잘도 뛰어내리던 학생회관 3층에서 뛰어내리다 잘못돼서 한 쪽 발목이 나갔다고 한다.

(가슴아픈 사실은 그 때 그리 지켰던 총학생회장이 십여년 뒤 한나라당 선거사무장으로 남편이 일하던 민주노동당 지역에 왔다. 원래 자기 표현이 적은 사람이지만 직접 만날게 될까봐 안보려고 애쓰는 듯하게 느껴져서 내 맘이 더욱 아팠다)  

 

몇번에 걸친 수술로 그냥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조금 많이 걷는다 싶으면, 겨울날 아침이나 비오는 날이면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를 못한다. 장애인이다.

이른바 청천벽력같은 일대 사건에 아버님의 큰아들에 대한 마지막 꿈과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고 회복하러 남도 끝 고향 완도에 와 있는 아들이 어지간히 밉기도 하고 안됐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독한 맘 먹고 나머지 두 아들을 이런 악에서 구하고자 나중에는 터줏대감,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만인의 인정을 받으시던 완도 고향마을의 청년회장을 접고 광주로 이사를 감행하시기까지 했다.  

 

경당에서 장비가 휘두르던 월도(긴 장대가 달린 칼인듯)를 다뤘다는 남편은(날렵했다는 얘기를 엄청 강조하면서)  오랜 치료와 회복기간을 거쳐 0.1톤이 넘는 거구가 되었던 것 같다. 1학년때 증명사진을 가로로 많이 늘린 모습이 내가 만났을때의 모습이다.

그 당시 많은 학생운동권이 그렇듯이 부모님의 눈물과 호소어린 회유, 폭력행사까지에 이르기도 하는 협박을 외면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부족한 한 힘 보태고자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후배양성과 사학비리 온상인 대학을 정상화 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그리고 재야단체 상근 일꾼으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 딛게 된다. 그 당시 봉급은 없고 교통비와 생활비는 새벽 세차였다. 그래서 나오는 월급은 30만원. 남편, 부인, 자식들까지 한 집에 두 대에서 세 대 이상 차가 있는 그런 아파트에서 2년 가까이 새벽세차를 했다. 어떤 날은 전날 뒷풀이를 늦게까지 하고 일어날 자신이 없어서 세차하러 갈 때 타는 버스 정류장에서 잤다고도 했다(정말 무식했다. 젊었던 것일까?)

 

그렇게 청년시절이 보내고 결혼하고 민주노동당에서 일할 때 소위 '민주화보상법'이 만들어지고 남편에게 1억 5천만원의 돈이 나왔다. 발목병신 된 값이라고 누군가 가슴아파 하면서 얘기했다. 남편은 혹여 시댁어르신들이 알면 이리저리 갈등이 생길까봐 말하지 않았다. 우선 1억은 공동체에 기증했다. 3천은 사람 좋아 카드 빚을 내서 돈을 빌려주고 막 쓰던 둘째의 빚을 갚아주고 신용불량자를 면하게 해주었다. 천 오백만원은  피땀흘려 겨우겨우 마련해 쌀농사를 지어먹는 완도섬 손바닥만한 논을 막내아들 등록금때문에 팔아야 하는 사정에 눈물흘리시는 어머님을 보고 내가 드리자고 했다. 나머지 오백은 공동체에서 공동육아 어린이집 만든다고 출자금 모을 때 빌린 대출금을 갚는데 썼다. 1억 5천 큰돈이기도 하고 금방 사라지는 작은 돈이기도 하다. ^^

 

둘 다 돈 개념이 없기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돈이기에 그냥 우리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그 1억으로 장학금을 만들거나 대안학교를 만드는데 썼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공동체에서 어떤 사업에 1억을 함께 넣었는데 사업이 제대로 안돼 정리하면서 남편에게 일부 돈을 돌려줬다. 남편이 그것으로 시작한 것이 2년동안 한 유기농매장이다.

난생 처음으로 자영업자, 이른 바 사장님이 된 것이다. 한 5년 넘게 해 온 민주노동당 간부를 정리하고 자영업자가 된 것이다. 유기농매장을 한다니 나도 내심 좋아는 했다.(이왕이면 하는 일이 진보와 좋은 세상 만드는 여러 영역중에 하나였으면 하는 바람이 나에게 많았기에)

하지만 과정에서 기획부터 여러가지 것들을 나와 나누지는 않았기에 난 좀 서운해하고 있었고 그 간 살면서 쌓인 여러 감정땜시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나또한 민간어린이도서관을 만들고 운영하는데에 온 힘을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난 우리가 바라는 대안의 삶, 대안의 세상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남편이 현실경제를 피부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나 또한 실물경제나 현실경제를 잘 알지 못하고 늘 최저생계비 이하의 경제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주식이나 기타 여러가지 경제흐름은 학습을 통해서 알아가는 상태였기에.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어차피 선택한 자발적 가난의 삶이기에,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여겼기에..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말 좋은 태도는 아닌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생활하고 살아가는 그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민주노동당 간부였고 현재 당원이기도 한 그가 가게를 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삶에 밀착해 갔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유동인구를 비롯한 입지조건을 정확히 좀 파악했어야 했고 유기농시장의 특성과 현실을 더 파악해야 했던 것 같다. 남편도 우선 다른 사람 가게에서 일을 배우고 결정할 것을 그랬다고 정말정말 듣기 어려운 후회, 안타까움이 섞인 얘기를 처음 했었다. 딸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난 주로 재고 처리반이다) 했지만 현실은 현실이고 생활은 생활이다. 12시간 꼬박 일하고도 남는게 별로 없다면 어려워지고 일하는 사람도 지치고 나중엔 화도 나게 된다. 남편의 느긋한 성격이어서 그럭저럭 지냈지 나였으면 제 풀에 지치거나 속상해서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장사꾼 똥은 개도 안먹다는 말이 있다. (왜? 속이 새까맣게 타서 똥도 먹도을게 없단다. 순대국 장사하는 울 친정엄마 말씀. 아무래도 사위를 위로하려는 말씀아닐까 싶다)

 

 

정리되면 어떤 결과가 남을 지는 잘 모른다.

인생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빛날때가 있으면 침잠할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내 안식년이 맞물려 경제활동을 안하는 상황이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저 김사장 잘 정리하고 잘 평가하고 잘 쉬었으면 좋겠다.

한 두어 달 어디 처박혀 공부하면서 앞으로를 설계해보고 싶다니

그러라고 했다. 못다한 공부 몇 달 해보는 것도 괜찮고

쌀 있고 김치 있고 딸내미 학비 낼 약간의 돈이 있고 .........흑흑

 

사람이 중요하다.

정 안되면 식당일 하든지, 알바하든지 뭐 무슨 수가 있을 것이고

평생 한 방향만 향해 뛰어 왔던 그 사람.

뛰느라 가슴 속 느낌과 울림을 듣지 못했고 (특히 옆에서 날 좀 보라고 외쳤던 마눌님 소리도 못듣던^^)

차분히 앉아 외부의 요구만이 아니라

자신의 요구, 제 스스로의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던 그이였기에

 

그럴 시간이 필요하다.

딸내미 뱃속에 있으면서 선거에 선거를 준비하고 거쳐온 그 숨막히기도 한 시간들.

벌써 아홉살인 딸과도 진한 부녀지간의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갖기를 소망한다.

 

불길처럼 활활 타면서 다툴 적도 있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지구를 살리고 싶고 다음세대를 위하는 그런 선한 마음 가진 사람이기에

그런 점을 무척 존경했기에 선택했던 동지였고

진보의 삶을 부족한 힘이지만 보태가면서 만들어 가고 싶었기에

더욱 높은 기대를 하고 때론 의존하려고 했기에

더욱 실망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머리속 진보는 몸과 뼈에 새겨진 5천년 넘는 가부장제와 온갖 시대에 안맞는 고정관념의 유전자를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수용하기로 하면서

나 또한 그 사람의 기대와 바람을 채워주기엔 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하면서

그러므로 그러면서 꽁꽁 매어놓은 뭔가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와 졌기에

그도 그런 시간을 가져으면 한다.

 

그 첫마음

그 연한 새순같은 마음

다시 들여다 보는 시간

가지시길

온 맘으로

바란다.

 

제 몸 속의 샘물이 가득차야

남에게 퍼 줄 것도 있다.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은 가슴을

벅벅 긁어봐야

생채기만 깊어진다.

고일 때까지

기다리고

생채기는 새살이 돋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우리가 인간으로 풍성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려면

이젠 자기를 돌아보고

감사의 마음이 차오르는

그 소중한 기쁨의 경험을

해야한다.

 

결승점은 출발점이기도 하다

애써온 그에게 박수를

톡톡톡 어깨를 두드려준다.

 

 

 

2009년 5월 15일 금요일

그냥 새벽에

바느질 된 솔기를 드러난

뒤집어 입은 치마

화장실 거울 앞에서 알았다.

 

간 밤 그나마 12시전에는 재우려고

부산을 떨다가 정신없이 뒤집어 입은 줄도 몰랐던 게지

갑자기 애 낳고 막 키우던 그 시절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회의하러 갔던 일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덧없이 웃는다.

그때도 어이 없어 웃었던 기억이 나서

다시 웃는다.

얼이 빠져있었지. 정신이 온통 없었지

 

솔직히 까놓고

한 번 그저 한 번 안아보겠다고

한 번 그저 한 번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다고

그 맘 하나로 얻은 아이.

아니 한 번, 그 한 번, 몸에 품어 키우지 못하고

하늘에서 받은 별씨앗을 채 싹틔우지 못하고

다시 하늘로 돌려보낸 차디찬 몸, 생명력 없는 몸

그 몸에 다시 온 고마운 씨앗, 더 없이 고마운 씨앗

미안하기도 한 씨앗, 잘 키워보겠다고

더 보고 싶고 부화하고 싶었던 그 절절한 맘 때문에

서럽기까지 했던 임신과 출산.

 

알았다.

낳고서야 알았다.

임신은 상상이요

출산은 현실인 것을

얼빠진 년 되기 금방이다.

산기 덜 빠진 핏기 없는 맑은 얼굴로

한 솥 가득 미역국을 먹으며 젖을 대고 있었다.

 

그저 한 번 안아보고 사랑의 결실이라고 어떤 모습일가 보고 싶은 그 마음에

너를 품고 낳았는데 낳았을 뿐인데

이 거친 세상, 이 오염된 세상, 이 정글같은 세상에

어떻게 너를 기르니, 어떻게 너를 두고 가니,

내가 너무 욕심이 컸구나. 나 하나면 족한데. 나로 끝나면 되는데

내 욕심 때문에

이 여리디 여린 생명

이 따스한 아기 새

이 얇은 뼈와 덜 여문 살을 가진 이 작은 생명을

낳았구나.

세상과 만나게 했구나.

세상에 출품했구나.

 

그저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랬다.

아직 네가 올 세상이, 네가 살아갈 세상이, 네가 사랑받을, 네가 사랑할 세상이

아닌 것을

아직 어미인 내가 만들어 줘야 할

내 몸을 헐어서라도 이룩해 놓고 가야 할 세상이

내 뼈를 추려서라도 지어놓고 갈 네 쉴 만한 집이 지어지지 않았는데

너무 성급했구나 엄마가.

그저 네가 와 줬다고 기뻐하며

너를 무조건 잘 품어 기르고 낳고 싶어

다시는 몸밖으로 흘러 나가는 핏물로

너를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유난 떤 다는 시선 그야말로 신경쓰지 않고

네게 좋은 공기 주는 기체조를 하며

너를 세상 밖으로 밀어 낼 그 힘을 기르고

너를 가장 편안하게 맞이하고 싶어

어미가 할 수 있는 것 힘쓰는 것 그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것 다 하고 싶어 훈련했구나.

그 봄, 여름 햇살을 걷는 것도

멀고 낯선 길 찾아 가는 길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미안함뿐이었다.

준비도 없이 맞았다가

준비가 없어 그저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인연이 아니었다고 위로하지만

싹틔우지 못하고 떠나 보낸 아이.

외롭게 외롭게 찌꺼기 하나 남지 않게

떠나보낸 아이.

이미 핏물로 흘러 흘러

내 몸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데

몇 번의 숨 들이킴으로 정신을 잃어 기억은 없지만

내 몸 샅샅이 흔적을 청소했던 그 아이.

다시는 준비없이 맞고 보내지 않으려고

부단히 마음 썼던

그 마음도 차마 밝은 빛에 드러내 말하지 못했던

그 시절, 너는 그래도 내가 와서 생명으로 나와 세상과 만났구나.

 

고마우이, 내 딸아.

네가 예현이다. 두레. 뱃속이름 두레. 내 딸.

한 순간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 내 딸아.

이 또한 미안하구나. 미안해.

엄마가 살아온 시대적 한계이고

한계에서 자유롭고 싶었지만 여전히 자유롭기가 힘든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엄마의 한계

왜냐하면

세상을 바꾸는 일이 만만치 않기에

엄마 때는 하나만 낳으라고 했단다. 주변 사람들이든 본인이든.

이미 경제적으론 자발적 가난을 신념으로 삼았고

육아에서는 활동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적당하다고.

엄마도 여기엔 동의했지(머리론^^)

(사실 엄마는 셋은 낳도 싶었어. 좋은 세상 오면 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했다. 어느 날인가 전철을 타고 가는데 귀뚫은 예술가 같은 아빠와 사람 좋은 것 같은 엄마, 그리고 아들 셋이 있었어. 세 아이는 아기 곰 세 마리처럼 타고 매달리고 징징거리고 얌전하기도 하고 그러더라. 엄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삶이란 결혼이란 인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고 보기 좋았다. 물론 그 부부의 갈등까지는 내가 생각하지는 않았고. 거기까지야..... 뭐....절대적 사랑의 신봉자였으니까. 내가.... ㅎㅎ)

 

갑자기 시가 산문이 되고

시적 영감이 회한이 되고

그러네.

짧은 순간,

그 찰나를 잡아내는 언어.

그 찰나에 떠도는 그 낱말들.

그것을 잡아 땅바닥에 앉히는 것이

시인인 거지.

시인은 가수이자

가수는 시인인거야.

 

아직도 예현이를 앞둔 엄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엄마는...

그래도 얘기할게

시인은 가수이자

가수는 시인이고

누구나 시인이고

누구나 가수야.

다만 평가하지는 말자는 거지.

직업과도 성과와도

그 맘이 있고

그 느낌이 있으면

그리고 애써 만들지 않고

저절로 나오면 되지.

그러면 돼

자연스러운 거.

 

엄마는 횡설수설

뒤집어 입은 치마에서

여기까지 왔잖아.

육아일지까지 온거니?

여하튼

여기까지.

 

네 가슴이 말하는 것을 들어.

엄마가 뭐라고 해도

네 가슴이 말하는 것을 들어라. 내 딸아

엄마는 결코 널 대신 살아줄 순 없어.

너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너야.

네가 행복하면 좋아.

네 말처럼

엄마가 그림 좋아하니까

초등학교 앞에서 그림 그려서

(네 말처럼 정성들인 것은 100원, 그냥 그린 것은 10원 ^^)

아이들에게 팔아도

그게 행복이면 행복인거야.

딸아

날개를 펴고

너를 사랑하고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

배부를 것은 보장할 순 없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그래도 네가 행복하다면

넌 충분히 즐겁게 그 길을 가리라고 생각해.

바람이 돼든 구름이 돼든 새가 되든

온 힘을 다해

빌고 또 빌게너 답게 살아

그게 네가 빛나는 길이라고 생각해

엄마는 그 중간 쯤 살았다고 할 가?

 

아직도 못버린 희망은

선배는

갖가지 경우의 수든 실험이든

경험이든 그것을 토대로

안되는 경우를 밝히면서

후배들이 되는 경우의 확률을 높이는

이른 바

시행착오를 줄이는 그런 역할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한가지 얘기해 줄게

어떤 것은 바보같이

그 값을 치러야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있어

인생이 그래.

물론

배밀이 안하고 걸을 수 있다는 거지.

배밀이는 시행착오로 보면 될까, 안될까?

수험료 내도(시간이든 돈이든..)

배밀이를 하면 좀 더 튼튼하게 건강하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거야.

그게 인생이기도 하다.

네가 요즘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지.어리광을 부리는 **이를 보면서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를 대왔던 엄마에게

들이대고 있다는 거 알았어.(사실 몰랐어)

그러나 엄만 고마워. 힘들지만

엄마는 그걸 못했어.

어린 엄마는 그래도 바쁜 엄마. 덜 성숙한 아빠를 이해해야만 했거든.

 

그래도 엄마

공부하고

엄마안의 소리를 들으며

네게는 최소한으로 상처를 주려고 해.

상처없는 인생이 어디 있게니?

 

하지만

엄마가 할 수 있는.

엄마가 차마 무너지지 않을 그 경계까지는

엄마가 할게

널 사랑해

언제 이해해 줄가?

이해를 바라는게 넘 욕심일가?

 

예현아

엄마는 네 엄마이지만

네 인생의 선배이고

다 따를 필요는 없지만

널 엄청 사랑했다는 거.

널 낳아서 더욱 사랑했던 엄마였다는거 (엄청 낮은 단계이지?^^)

 

하지만

누가인정하든말든

너로서 너를 사랑하는

너로인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네가 가진 그 한가지 뭔가를 발현, 발산하는 너로 커가길

바라는

여성으로

인생의 선배로

살고싶다.

그렇게 엄마는 살고 싶다.

 

뒤집어 입은 치마가

이렇게 긴 글을 쓸 줄은 몰랐고

아마 그건

곁들인 맥주와

남아있는 집안의 술이겠지만

모처럼

네게

이런 말을

네가 아홉 살 된

구년 묵은 말을 할 수 있어서 엄마는 좋다.

그냥 좋다

내일

아니 이미 오늘

현재 시간 다섯시

 

나는

이미 괜찮아.

 

어느 날인가

네가 엄마의

이 부족하고 노골적인 글을 보고

그래도 엄마를

무조건 주는 엄마가 아닌

삶을 고민하고

세상을 사랑했던

엄마로

인간으로

선배로 기억해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족하다.

 

예현아

엄마가 쉬고 있으니까

순대국 같이 거기에 소주 한 잔도 탁 곁들일 것 같은  자극적인  맛의 인생이었다가

요즘은 맑은 장국이 되는 듯해서

적응 이 잘 안된다고 어느 자리에서 얘기했던 게  생각난다.

 

이리도 살아보고 저리도 가보는 게 인생인가 싶다.

그 본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

 

짙은 꽃내음이 지는 5월이구나.

하여 계절은 짙푸른 여름을 향해 가는 구나.

엄마는 여름아이야.

가난한 사람 더 서러운 겨울에 안 태어난 게 다행이다 싶지만

사람들 여름 휴가연휴에 태어난 엄마는

생일상 차려먹기 힘들다며 어린 너에게 투정이다.

 

난 여름이 좋아

쨍쨍한 여름, 가난한 사람도 모기만 이기면 날 수 있는 여름

짙푸른 해변, 뜨거운 모래사장.

휴가에만 다녀오시고

나머지는 에어컨 나오는

도서관에서 책 보시거나

일터에서 일하시거나

글구 밤에 생맥에 마른안주

출출하시면 골뱅이 소면도 괜찮고

 

긴 얘기 썼네

요즘 엄마가 읽은 책

‘뼛속까지 내려가 써라’ 땜시 엄마 엄청 기운 얻었나봐

아침에 세 편이나 글썼다.

세 권의 시집 읽고 엄청 사랑의 열정 불태우고 ^^

딸아 딸아 내 딸아

지금 여기, 다행이다, 거리에서, 좋아하는 내 딸

 

오늘

‘사랑, 사랑, 예현이 우리딸, 내 사랑, 예현이 우리딸 내몸같이 사랑하네~~’

이 노래 좋아하단고 했지?

근데 아들 낳으면 어떻게 불러주냐고 물어봤지?

딸을 아들로 빠르게 부르라고 엄마는 가르쳐 줬지. 고추라고 바꿔도 된다고 팁까지 알려줬지. ㅎㅎ

 

사랑해 딸아

해가 뜨는 구나.

새벽녘 아버지 안들어와 그냥 저절로 깬 엄마가 본 그 장면으로 시작한 것이

벌써 8쪽을 이루는 구나.

어쩌냐

그렇게 된 것을

엄마의 글발, 술발 인것을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니들이 고생이 많다.~~